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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미사일 '광명성1호' 발사때 주민들 "영화 찍나보다"


입력 2014.10.26 09:58 수정 2014.10.26 10:02        김소정 기자

유엔 지원 끊길까봐 전전긍긍 끝에 이듬해 발사 강행

문화부 차량으로 이송하자 주민들 "영화 찍는줄 알아"

지난 2013년 1월 14일 북한이 첫 실용위성이라고 주장하는 `광명성 3호 2호기'의 발사 성공에 이바지한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 일꾼들이 평양 체류 일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평양고려호텔 관계자가 '은하9호' 글씨가 쓰인 로켓모형을 과학자에게 주고 있는 장면.ⓒ연합뉴스
지난 2013년 2월 10일 설명절을 맞아 평양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열린 설맞이 공연 '햇님의 축복'에 북한이 지난해 12월 장거리 로켓을 이용해 발사한 '광명성 3호' 2호기를 형상화한 인형이 등장해 학생들과 춤을 추고 있다.ⓒ연합뉴스

북한의 미사일 개발 역사는 40여년에 달한다. 주목할 점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인 1990년대 하반기, 참혹한 식량난을 겪던 와중에 큰 성과를 낸 것이다.

1970년대 초 소련제 미사일 수입으로 시작된 북한의 미사일 도입과 개발 역사는 1998년 7월 첫 장거리미사일인 ‘광명성1호’ 시험 발사 성공으로 정점에 올랐다. 특히 1991년 소련에서 미사일 분야의 전문가 20여명이 북한으로 망명한 사건이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근 북한이 모든 미사일 전력을 통합하고 발사 체계를 자동화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바 있지만, 이 자동화 체계의 일부는 김일성 주석 때 이뤄진 것이라는 정보가 21일 대북소식통으로부터 입수됐다.

1970년대 당시 툭 하면 북한 상공에 나타나던 미군의 고공정찰기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던 김일성 주석에게 북한군 반항공사령부와 공군사령부가 동시에 정찰기 격추 계획을 보고했다.

반항공사령부는 마침 소련에서 들여온 지상 대 공중 ‘드비나’ 미사일로 격추 계획을 세웠고, 공군사령부는 역시 소련에서 들여온 미그-19기로 미군 정찰기를 격추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결과 어이없게도 북한군의 미사일이 북한 공군기를 추락시키는 코미디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대형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김일성이 내놓은 대책은 공군과 반항공 사령부를 연합시키도록 하는 것이었고, 김일성의 지시로 공군사령부 산하에 반항공사령부가 소속됐다. 또 송신 암호를 일치시켜 레이더에 걸린 공군기를 미사일로 격추할 때 양쪽 송신 암호가 일치하면 미사일 버튼을 눌러도 미사일이 발사되지 않는 시스템이 개발됐다.

현재 북한은 공군과 반항공 분야를 통합 체계로 운영하고 있으며, 미사일 발사 체계의 자동화까지 완수한 상태로 이 시스템은 이미 김일성 주석이 집권하던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북한에서 미사일의 도입과 개발은 지상에서 공중을 공격하는 대공미사일로 시작됐다. 그리고 북한은 1988년 소련산 지상 대 지상 스커드미사일로 첫 시험 발사 성공을 거뒀다.

1985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처음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하면서 내린 지침은 “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였다고 한다. 당시는 북한이 유엔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연명하던 때였다.

광명성1호는 원래 1997년에 발사될 계획이었지만 북한 외교부에서 김정일에 “지금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면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건의해 잠시 보류됐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일은 1년을 못 넘기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고, 오로지 이 계획에만 모든 것을 집중시켰다.

광명성1호의 시험 발사는 성공했다. 주민들은 굶어죽어가고 있었지만, 북한 당국은 “첫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북한 당국은 광명성1호 시험 발사를 극비리에 진행하면서 인공위성 발사로 둔갑시켰다. 당시 미사일 장비 수송을 위해 차번호가 ‘60’으로 시작하는 문화예술부 차량을 이용한 것이다. 차량 수대가 한꺼번에 이동하는 장면을 지켜본 주민들은 당국이 영화 촬영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광명성1호의 시험 발사가 성공하자 김정일은 한껏 고무됐으며, 북한 매체들도 “우리의 기술과 자재로 만들어진 인공위성의 첫 발사가 성공했다”고 홍보했다. 시험 발사에 기여한 연구원은 물론 실험수와 노동자들에게까지 김정일의 표창장과 노력영웅 칭호, 각종 훈장과 학위가 수여됐다.

김정일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장거리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김정일은 2006년 9월에도 장거리미사일을 시험 발사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2009년 4월5일 함경남도 무수탄리에서 진행된 ‘광명성2호’ 발사를 성공시켰다. 이때 발사로 북한은 사거리 4000㎞의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관측됐다.

김정일은 장거리미사일 발사 시험을 거듭하면서 “미사일 개발연구사업과 해안포를 비롯한 장거리포에 역량을 집중하라”고 지시했으며, 지금의 병력 체계를 갖추게 됐다.

현재 북한은 사거리 3000~4000㎞의 무수탄미사일, 사거리 300~500㎞의 스커드미사일과 1300㎞의 노동미사일을 개발해 실전 배치해놓은 상태이다. 특히 2010년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에서 차량에 탑재된 사거리 3000~4000㎞의 무수단미사일을 공개했다.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퍼레이드에서 사거리 5000㎞ 이상으로 추정되는 차량탑재 신형 미사일인 KN-08을 공개했다.

미사일 보유 현황을 보면 스커드 600기를 비롯해 기타 미사일 300여기 등 모두 1000기 정도에 이르는 미사일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시기 북한에서 핵과 로켓을 연구하는 제2자연과학원이 특수 기지로 조성됐다.

북한의 미사일 연구는 처음 평양시 은정구역에 있는 국가과학원에서 시작됐으나 1980년대까지 별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1985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방과학을 제2자연과학원으로 이관시키고, 특수기지로 꾸릴 것을 지시한 이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북한은 제2자연과학원을 국방과학 전담 연구원으로 꾸미기 위해 과학원 내에 있던 다른 기관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심지어 중앙방송국 방송탑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제2자연과학원에서 미사일 연구를 전담하는 166공학연구소는 연구사가 1000명에 실험조수가 500명, 공장노동자가 800명 정도로 구성돼 제2자연과학원 안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연구사들 대부분을 평양국방대학, 룡성약전공업대학,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리과대학, 최우수 졸업생들로 선발해왔다. 1985년 11월부터 약 3년간은 김일성의 아들 김영일도 이 연구소에서 연구사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제2자연과학원 연구원들은 이란과 수리아, 리비아 등에 합동개발연구로 파견돼 외화벌이에도 일조하고 있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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