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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법이 먼저 용서?' 공소시효에 멍드는 피해자


입력 2015.11.09 09:32 수정 2015.11.09 09:42        이슬기 기자

<19대 국회 핫이슈 법안의 운명은?④-또 다른 태완이법>

강력범죄 저질러도 공소시효 지나면 법적 처벌 '속수무책'

19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진행중인 가운데 이번 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되어야 할 법안은 물론 통과는 됐지만 향후 논란이 예상되는 법안들이 즐비하다. '김영란법'은 내년 9월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법안 시행에 따른 후폭풍이 예상되는 법안이다. 여기에 북한인권법과 테러방지법은 이번 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되어야할 법안으로 지목되지만 현재 상임위에서 잠을 자고 있다. 이에 데일리안은 19대 국회에서 큰 이슈를 낳은 법안들을 살펴보고 향후 전망을 진단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수십년전 강력범죄들이 최근 공소시효가 지남에 따라 처벌조차 할 수 없게 되면서, 공소시효 폐지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자료사진)ⓒ데일리안
가해자들은 떳떳했다.

2002년 방송 보조출연자 관리 업체 직원들로부터 수차례 집단 성폭행을 당한 언니는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목숨을 끊었고, 언니에게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권했던 동생도 죄책감에 못 이겨 자살했다. 딸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자매가 자살한 한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다.

자매의 어머니는 가해자 12명을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 법원도 이들의 성폭행 혐의를 인정했다. 문제는 소송 제기 시점이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72단독 곽형섭 판사는 해당 소가 성폭행 발생으로부터 9년 6월, 자살 시점으로부터 4년 6월이 지난 후 제기된 점을 들어 “민법상 소멸 시효인 3년이 지났다”며 기각했다.

공소시효를 넘긴 가해자들은 “내가 성폭행했다”고 당당하게 인정했다. 공소시효의 보호막에 가린 그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떳떳했다.


‘기간만 지나면 무효’ 공소시효의 그림자

1954년 국내에서 첫 시행된 ‘공소시효’는 검찰이 피의자를 재판에 회부·처벌할 수 있는 유효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범죄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당사자들의 기억이 부정확해지는 등 사실관계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만큼 법적 안정성을 고려하고 △국가의 수사능력 부족 및 태만으로 장기간의 도피생활을 한 피해자가 법적 처벌과 동일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취지다.

문제는 이같은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도 공소시효 기간 동안만 수사망을 피하면 이후부터는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간이 만료된 사건에 대해선 어떠한 경우에도 법적 처벌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법 체계다. 강력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다.

실제 2012년 네티즌들의 재수사 청원운동까지 불러왔던 ‘단역배우 자매 집단 자살사건’을 포함해 일명 ‘태완이 사건’으로 불리는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3대 미제 사건으로 남은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 ‘이형호군 유괴·살해사건’ 등이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법적 처벌이 허용되지 않는다.

외국의 경우 △일본은 지난 2004년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15년에서 25년으로 늘렸다가 2010년 살인과 강도살인 등 12가지 중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했다. 실제 1995년 4월 발생한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은 기간 만료를 눈앞에 둔 2010년 법이 개정됨에 따라 공소시효가 사라졌고 △영국은 경범죄에 대해서만 공소시효를 적용하되 원칙적으로 모든 중범죄에 대해선 공소시효가 없다.

또한 △미국은 살인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아예 적용하지 않는다. 아울러 일부 주(州)법에 따라 성범죄, 아동학대 범죄도 공소시효가 없다. 특히 △독일은 나치전범 및 모살죄(계획적인 중범죄), 집단살해죄 등 반인륜적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폐지, 현재까지도 나치 전범을 추적하고 있으며 공소시효를 중단시킬 수 있는 제도를 운영 중이며 △프랑스는 살인죄가 아니더라도 모든 반인권범죄에 대해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인 추세로 가시화되면서,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해당 문제에 대한 사회적 재논의 및 폐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대표는 이와 관련해 “공소시효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수사의지를 약화시키고 증거보관 체제의 미비를 초래한다”며 “사건해결이 가장 용이한 발생 초기에 용의자 특정과 증거확보가 안되면 ‘미제 사건’으로 분류돼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차피 수사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낙인이 찍혀 서류창고의 속으로 들어가버린다”고 주장했다.

특히 표 대표에 따르면, 1970~1980년대에 발생한 사건의 경우, DNA 신원확인 기법이 등장하기 전인 당시에는 현장에 남아있던 범인의 체액과 모발 등이 제대로 보관되지 않았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이후 DNA를 활용한 기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현장에서 취한 증거물만으로도 범인을 검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공소시효가 ‘시간이 흐르면서 증거의 확실성이 떨어진다’는 과거의 수사 환경 하에 시행됐음을 고려할 때, 조속히 재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수도권의 한 지방법원 정문에 그려진 정의의 여신 이미지.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태완이법’ 제정됐지만...‘사각지대’ 여전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난 3월 발의된 법안이 일명 ‘태완이법’이다. 태완이법은 지난 1999년 5월 대구에서 여섯 살 김태완 군이 신원불명의 한 남성에게 끔찍한 황산 테러를 당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아이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49일간 지옥 같은 고통에 몸부림 치다 세상을 떠났다. 부모가 생업을 접고 16년간 범인을 찾던 중 이웃주민 A씨를 유력용의자로 지목했으나 사건 발생 15년(개정 전 살인죄 공소시효)이 지나면서 기각됐다.

이에 지난 3월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또다른 태완이가 생기는 것을 막자는 취지로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 '태완이법'으로 불린 해당 개정안이 올해 7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7월 31일부로 ‘살인죄’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공소시효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고, 경찰은 지난 2000년 8월 1일 오전 0시 이후 발생한 273건의 미제 사건에 대해 전면 재수사에 착수키로 했다.

이로써 지난 2003년 발생한 포천 여중생 납치·살인사건, 2004년 9월 대구 요구르트 독극물 투입 사건과 같은 해 10월 경기 화성 여대생 노양 살인 사건, 2006년 노들길 진양 살인사건, 2008년 5월 대구 초등학생 허모양 납치·살인사건, 2009년 2월 제주 어린이집 보육교사 살인 사건 등이 공소시효에 얽매이지 않고 범인을 끝까지 추적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태완이는 자신의 이름을 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공소시효 폐지가 적용되는 사건 발생 시점인 2000년 8월 1일보다 태완이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는 이유다. 태완이 부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괴로워하는데,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살인범은 길거리를 웃으며 활보한다. 억장이 무너진다”고 토로했다.

이뿐이 아니다. 살인죄만큼이나 피해자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기는 강간죄 역시 공소시효의 그늘 뒤에 숨어있다. ‘태완이법’이 살인죄를 넘어 ‘강간치사’, ‘유기치사’ 등 개별법 개정으로 확대돼야 하는 이유다. 지난 2011년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를 계기로 13세 미만 아동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간 및 준강간 범죄의 공소시효가 사라졌지만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성폭행 피해자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물론 공소시효 폐지에 대한 여론의 요구는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사건 발생 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진술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미제 사건이 쌓일수록 국가적 비용 증가와 공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주장 등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따라서 지속적인 이슈화 노력으로 사회적 논의가 선행돼야 법적·제도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서 의원은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에게는 공소시효가 있을지 몰라도 피해자와 유가족이 겪을 고통은 평생 공소시효가 없다”며 “태완이법으로 제2의 태완이 사건을 방지하고 억울한 죽음은 끝까지 그 진실을 파헤치고 살인자는 반드시 검거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살인죄뿐 아니라 강간 등 강력범죄로도 적용 대상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슬기 기자 (wisdom@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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