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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걱정의 램프'를 문지르며 지니를 기다릴까?


입력 2016.03.03 10:18 수정 2016.03.03 10:30        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과다걱정증후군'이 지배하는 현대의 삶

애니메이션 영화 '알라딘'의 한 장면 ⓒ브에나비스타

동화 속에서 주인공 알라딘은 램프를 애지중지 한다. 램프에 마법의 거인 '지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라딘은 마술 램프를 비벼 지니를 깨우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한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도 램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마술램프가 아니라 '걱정의 마술램프'이다. 그 이름은 지니가 아니라 걱정이라는 거인이다. 그 걱정의 거인을 불러내어 명령한다. “나를 고뇌의 세상으로 인도해다오.”, “지금 불안의 고통을 이리로 데려오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불안과 고통 그리고 걱정을 해결하기보다는 지니같은 환영에게 그 처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지니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걱정이나 불안을 해결해주는 것은 지니가 아니며 스스로이어야 한다.

마술 램프는 동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알라딘이 아니기도 하다. 밑도 끝도 없는 걱정과 염려를 불러내어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램프증후군(Lamp Syndrome)'이라고 한다. 마치 걱정의 램프만 붙들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지나친 현상을 정신병리학에서는 불안장애라고 한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는 등의 책을 쓴 미국의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22%는 사소한 일에 대한 것이며, 4%는 우리 힘으로는 바꿀 수 있는 일이다.”라고 했다.

결국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4%에 해당하고 96%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 된다. 96%는 하나마나한 걱정인 셈이다. 생기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얻는 것은 앞으로는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쓸데없는 일에 걱정과 염려를 하는 바람에 오히려 될 일도 안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 선수들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감이 있어야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골프장에서 아마추어는 걱정하는 대로 공이 날라 가고 프로는 마음먹은 대로 공이 날라 간다고 한다. 우리 일상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런 램프증후군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우선 걱정이 많아진다는 것은 해야 할 것이 많은데 그것에 대한 불확실함이 높아질 때 생긴다. 만약 해야 할 일이 없다면 걱정이 있을 리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 할 일이라는 것은 정말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더 염려와 걱정이 된다.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기에 어떻게, 어떤 것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걱정 많은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스스로 해결하면 될 것이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예측된다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할 지 알 수가 없다. 예전과 같이 예측되지 않는 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재난도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는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기에 개인이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치명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개인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그대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이다.

이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위험 사회의 도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현대가 개인의 통제력을 넘어 복잡해졌다는 것이고 그러한 위험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찾아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력주의 사회의 역설이 사람들의 불안증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모든 것을 평가받고 그 평가에 따라서 조직이나 사회적인 입지가 좌우된다. 지금 아무리 안정적이어도 평가에 따라 한순간에 그 입지가 무너질 수 있다.

지금 현재 유지하고 있는 삶이 한순간에 붕괴되는 것이다. 생산성이나 실적 평가가 그 예이다. 객관적 평가라는 제도에 따라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어떻게 개인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평가가 많은 사회는 걱정을 한순간도 떼어놓을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갈수록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더 맞아 떨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지식과 정보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안다. 지식 정보화의 역설이다. 언제나 서치가 가능한 스마트모바일 환경에서는 해보지도 않고 미래를 알 수 있을 듯싶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실행을 하지 않아도 먼저 그 결과에 대해서 아는 듯 싶다. 그렇기에 직접 해보지 않고 그 결과에 대해서 걱정부터 한다.

하지만 답이 명확해 보인다고 해도 직접 해볼 때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 물론이다. 램프의 요정은 결국 상상속의 존재이듯이 피어오르는 걱정은 그 자체로 환영이 될 뿐이다. 걱정은 일을 하면서 성찰적인 진행을 위해 필요하다.

램프증후군이란 결국 스스로 개인들이 능동적인 자세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는 내외적인 요인이나 환경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그 장애요인을 없애고 개인적으로는 선택과 실천으로 자신의 경험적 성공을 작게나마 쌓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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