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이슈' 선점한 김종인의 두번째 묘수
내부 합의추대론 논란 잠재우고 외부 이슈 선점, 책임론은 정부로 넘겨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가져가고 김 대표는 구조조정 가져가"
‘정치 신단(神段)’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또다시 묘수를 뒀다. 이번엔 자신의 전공 분야이자 여권의 담론인 경제 이슈로 총선 이후 정국을 신속하게 주도하는 모습이다. 지난 3월 중도층을 혼란케 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중단시킨 뒤 곧바로 ‘야권 통합’ 카드를 내밀며 국면 전환에 성공한 데 이어 두 번째다.
김 대표는 최근 공식 석상에서 정부여당의 실업대책 마련을 전제 조건으로 기업 구조조정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어 대량 해고에 따른 최저임금 인상, 실업수당 지급기간 연장 등의 대안 마련을 위해 당내 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노동계가 당 지분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야권에서 그간 ‘금기어’로 취급받던 해고·실업 문제를 당 대표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야당 대표의 구조조정 발언은 즉시 정치권 전체의 이슈로 급부상했다. 특히 파괴력 측면에선 같은 날 출범 100일을 맞아 ‘유일호 경제팀’이 향후 중점 과제로 제시한 '산업구조 개혁’을 압도하고 있다. 각 당이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규모에 관해선 조금씩 입장 차가 있지만,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통한 경제구조 개편의 필요성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는 데다 20대 국회를 앞두고 민생·경제 행보가 필수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21일 기자들과 만나 “미시적 정책뿐만 아니라 거시적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며 구조조정을 포함해 신성장동력 발굴을 통한 산업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여·야·정이 산업구조개혁 청사진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도 했다. 이슈 선점에선 더민주에게 선두 자리를 내줬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라도 더민주보다 한 발 더 나가겠다는 의지를 적극 내비친 것이다.
지도부 부재로 혼란을 겪고 있는 새누리당 역시 여야와 정부가 참여하는 구조조정 관련 협의체 구성을 제안하며 호응했다. 이에 정부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여·야·정 협의체를 국회에서 구성하겠다는 것은 우리로선 당연히 환영이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며 "국회에 가서 설득할 건 설득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건 받아들일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슈 선점에 성공하자, 김 대표는 즉각 공을 정부에 넘겼다. 그는 22일 당 비대위 회의에서 “야당은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가 있어도 실질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먼저 정부 스스로가 구조조정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면, 우리당도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전통적으로 야당이 주장해오던 최저임금 인상 등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구조조정 무산에 대한 책임론은 고스란히 정부가 떠안게 되는 시나리오다.
특히 합의추대 문제로 들썩이던 당 내부도 상당 부분 잠잠해졌다. 김 대표는 당 차원의 기구 구성을 위해 비대위원들에게도 외부 전문가 추천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한편, 구조조정에 국한되지 않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 전반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당권 문제로 당 주류계가 날을 세우고 있지만, 경제민주화 이슈에 대해선 계파를 막론하고 제동을 걸기 쉽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합의추대론 논쟁에서 무게추가 옮겨가게 됐다.
정치권에선 김 대표가 현 시점에 구조조정 화두를 던짐으로써 △선거 직후 주도권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뿐 아니라 △야권에 표를 준 중도·보수층을 다시 한 번 붙잡았고 △당권을 둘러싼 친노·친문 세력의 목소리도 잠재우는 1석3조의 효과를 얻었다는 평이 나온다.
김미현 알앤써치 소장은 “지난번 대선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야권이 선점하던 경제민주화를 가져갔다. 그런데 이번엔 여권의 담론이던 구조조정을 김종인이 먼저 치고 나간 것”이라며 “안으로는 본인을 두고 한창 시끄러운 당 대표 추대설을 잠재우면서도 바깥으론 경제정당이라는 인식을 시키고, 이슈를 선점해서 당 안에서 본인의 몸값도 높이게 됐다”고 분석했다.
김 소장은 특히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되 대책마련이라는 단서를 붙였지 않나. 거꾸로 말하면 야당이 주장하는 대책이 확보 안 되면 구조조정 못한다는 것”이라며 “이건 이미 숱하게 나온 내용 아닌가. 너무 당연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거다. 그런데도 정부여당이 반대해서 구조조정 못한다고 하면 될 일이고, 김종인이 책임질 필요도 없다. 그런 수를 쓴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울러 엄경영 시대정신 소장도 “총선 후 김 대표가 리더역할을 계속 수행하기에는 의문이 드는 시기지만, 그렇다고 문재인 전 대표가 나서면 활동반경에 큰 제약이 될 수밖에 없어서 여러 가지로 복잡할 것”이라며 “이런 분위기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문제를 선점함으로써 리더십을 확고히 하고 당 장악력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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