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 수비 측 더그아웃에서 타임 요청을 한다. 불펜의 문을 열고 좌투수가 마운드를 향해 뚜벅뚜벅 올라온다. 좌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스페셜리스트다. 공격 측에서는 왼손 불펜 투수를 상대로 좌타자 대신 우타자를 대타로 투입할 것인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좌타자는 좌투수에 약하다’는 통념에서 비롯된, 올 시즌은 물론이고 오래 전부터 낯설지 않은 프로야구 경기의 한 장면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소위 ‘좌우놀이’라 부른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좌타자를 상대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기 위해 등판하는 좌투수를 지칭하는 ‘LOOGY(Lefty One-Out GuY)’라는 약어도 있다.
좌타자를 상대하는 좌완 불펜 투수는 실제 효용성이 있을까. 통념에만 의존한 기용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왜 많은 이들의 뇌리에는 좌타자에 안타를 얻어맞는 좌완 불펜 투수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을까. 모두 야구팬들이 궁금해 하는 사항 중 하나다.
KBO리그에서 지난 9일까지 20경기 이상 등판한 좌완 불펜 투수는 13명이다. 좌우 타자를 가리지 않고 등판하는 좌완 마무리 투수를 제외한 인원이다. 눈에 띄는 점은 대부분의 좌완 불펜 투수가 우타자보다 오히려 좌타자에 약했다는 점이다.
리그 최다 등판 투수인 ‘불꽃 남자' 권혁(한화)은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0.313으로 우타자 상대(0.228)보다 1할 가까이 높다. 권혁과 유사하게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우타자보다 1할 이상 높은 좌투수는 신재웅(SK), 박근홍(삼성), 윤지웅(LG), 이명우(롯데)다. 이쯤 되면 감독들이 과연 기록을 참고하고 이들을 좌타자를 잡기 위해 투입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박정진(한화)도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0.349로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 0.305보다 높다. 두드러질 정도의 큰 차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보다 높은 투수는 홍성용(kt), 심동섭(KIA), 강영식(롯데)도 꼽을 수 있다.
13명의 좌완 불펜 투수 중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보다 낮은 투수는 진해수(LG), 백정현(삼성), 심재민(kt), 김택형(넥센) 4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 중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3할이 넘는 진해수(0.314), 김택형(0.308)은 성공적이라 말할 수 없다. 이들은 좌우 타자 모두 3할의 피안타율을 넘고 있다. 불펜 요원으로서 합격점을 주기 어려운 이유다.
20경기 이상 등판 좌완 불펜 투수 기록(마무리 투수 제외) ⓒ 야구기록실 KBReport.com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높거나 혹은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3할이 넘는 이들을 걸러내면 진정 좌타자에 강했던 좌완 불펜 투수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구위가 좋은 우완 투수를 좌타자 상대로 투입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좌완 불펜 투수가 좌타자에 통하지 않는 것일까. 과거에는 좌투수의 희소성으로 인해 좌타자와의 상대 경험이 많지 않았다. 좌타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등 뒤에서 손이 나와 던지는 듯한 좌투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좌투수는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좌타자들도 좌투수에 맞설 수 있는 상당한 노하우가 쌓여 있다. 게다가 몇몇 한정된 좌완 불펜을 반복적으로 상대해 눈에 익으면 보다 유리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투수와 타자가 처음 만나 생소할 때는 투수가 유리하지만 맞대결이 누적되면 타자 쪽으로 기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좌타자를 상대로 한 좌완 불펜 요원의 투입은 잦은 투수 교체로 인한 경기 시간의 지연과도 직결된다. 속도감 있는 야구 경기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좌우놀이’가 사라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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