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가족 많이 달라졌다?...정말 그런 것일까
<김헌식의 문화꼬기>갈구되는 행복한 가족주의가 관건이다
요즘 드라마 속 가족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것은 드라마가 이전 드라마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단지 소재나 형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청자가 느끼는 현실이 많아 달라진 것인지 살펴야할 것이다. 시청자가 느끼는 현실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드라마가 사회 현실을 잘 반영해야 공감을 많이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말하겠기에 말이다.
그럼 드라마에서 그리는 가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봐야 할 것이다. 일단 이혼과 재혼 가정에 대한 드라마들이 최근 여럿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다. KBS ‘아이가 다섯’에서는 각자 돌싱이 된 남녀(안재욱-소유진)가 새롭게 가족을 일구어가는 내용이다. 이 둘은 한부모 가정에 조부모 가정 출신이기도 하다. 전에는 꺼리기도 한 소재였다. 흔히 예측할 수 있듯이 이들의 새로운 출발은 만만치가 않다. 반대와 갈등이 있어야 드라마가 극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방적인 결정과 통보보다는 합의해 가는 과정에서 각자 주체적인 측면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새로운 결합에서 항상 화두가 되는 것은 아이의 장래이다. 그들의 장래와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어느정도 반영하려는 노력이 좀더 진일보한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이들이 정말 드라마 속처럼 해피엔딩을 일구어가는 것이 극적으로 될 수 있을 것인지는 다른 문제이다. 극적인 결말보다는 현실적인 결말이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혼한 사람들의 로맨스와 재혼은 너무 많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미 식상하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새로울 것이 없다. KBS ‘백희가 돌아왔다’에서도 이런 돌싱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스토리에서는 돌싱 백희가 세남자와 벌이는 로맨스에 아이가 자신에게 맞는 아빠를 고르는 설정이 중요했다. 아이의 미래와 의사존중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MBC ‘결혼계약’에서는 미혼남과 싱글맘의 결합을 소재로 다루는가 하면, MBC ‘한 번 더 해피엔딩’도 이혼한 여성과 두 명의 남성이 벌이는 로맨스를 다뤘다.
로맨스에 좀 더 중점을 두는 경우, 그들의 일상생활의 내밀한 점보다는 케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1인 가구 소재도 여럿 다뤄진다는 점에서 변화의 증거라는 지적이 있다. ‘혼술남녀’나 ‘식샤를 합시다’는 적극적으로 1인가구를 내세우고 있고, ‘욱씨남정기’에도 1인 가구가 등장한다. ‘청춘시대’는 5명의 여성들이 함께 주거하는 쉐어하우스를 표방한다. 이러한 점은 과거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을 떠올릴 수가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하숙집과 대학생이라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하숙을 하는 것과 자발적 선택을 통한 쉐어하우스는 공교롭게도 여기에서 같이 만나고 있는 듯 싶지만, 달라진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대로 기존의 드라마에 천편일률적으로 등장했던 대가족 혈통주의 드라마는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렇게 드라마 속에서 달라진 혹은 여러 가족 유형이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나타낼 것이다. 현실에서 일반화 되어 있지 않아도 달라진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드라마 시청과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만혼이나 재혼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혼이나 재혼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상황을 좋게 생각하는 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새로운 출발이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 1인 가족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 상황 자체가 긍정적으로 읽힐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좋을 수가 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나 감내해야 할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모순도 정책적 고민과 함께 모색이 되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비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가족의 경우도 말이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시대적 대세이거나 옳다는 프레임으로 볼 수 없는 없다. 이는 동성애 가족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형태로 인정은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알파고 이후 인공지능 담론이 범람하면서 가족의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가 좀 더 많아졌다. 대체적으로 미래 학자들이나 미래학 담론들은 앞으로 일어날 가족의 해체 현상을 말한다. 결혼 제도 자체의 붕괴를 말하기도 하고 완전한 소멸은 말하지 많아도 이에 대한 회의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것을 대체할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혼이나 가족을 대체할 무엇인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야할 점은 인공 지능이나 그것이 장착된 로봇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 대체가 실현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과 비근하거나 더 뛰어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도 그것을 정확하게 예측할수 있는 이는 없다. 이러한 결핍 때문에 담론의 중심은 언제나 생명으로서 인간이다.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한 인간다움, 인간만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고유한 가치를 더 계발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인간이 반려동물이나 인공지능의 로봇에 완벽하게 대체될 확률은 매우 낮다. 그것은 기술 수준을 논외로하더라도 대중화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도 근접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유사인간이 많을수록 화목한 인간의 가족을 구가하고 있는 사례에 대한 선망과 경외의 심리가 늘어날 것이다. 그것은 이미 많은 육아관련 예능프로그램이 주목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깨어지는 가족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앞으로 가족은 성공한 사람을 의미하는 문화적 상징이 될 것이다.
특히 저성장과 소득 수준의 양극화는 결혼은 아무나 할수 없는 사치재 내지는 과시재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잘못하면 불행을 안겨주지만 잘 만하면 그것보다 우월하고 행복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능력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프레임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주 극빈의 상황에 있는 이들은 아이를 출산을 많이하려 할수 있지만 저성장 고착화 시대에서 행복한 가정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자수성가가 불가능한 닫힌 사회가 되고 있다.
당장에는 단기적으로 전통적인 가족에서 이탈하는 유형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 머물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고 할수 밖에 없고, 그러한 인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수 있는 날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경제적인 능력에 관계없이 아이를 많이 낳는 신가족주의 종족이나 민족 그리고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가능성이 더 많다. 물론 그러한 국가나 민족이 정말 강대국이나 선진국 나아가 문화국가인지는 논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를 반영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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