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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편승 반사효과만 쫓다간 야당도 공멸


입력 2016.11.13 07:25 수정 2016.11.15 08:42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여권 난맥상에 기댄 반사효과는 생명이 길지 않아

국가운영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최순실 정국 수습해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8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정혼란 상황에 대한 논의를 위해 열린 대선주자 조찬 간담회를 갖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성남시장, 문재인 전 대표, 추미애 대표, 김부겸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데일리안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민중총궐기대회에 참가한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12일 저녁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에서 촛불을 들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하며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미국 언론과 여론조사기관들은 모두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나타났다. 여론조사가 빗나간 것을 두고 특정한 의견이 다수에게 받아들여지면 반대의견을 가진 소수는 고립될까 걱정하여 침묵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효과’가 거론된다. 트럼프의 언행에 그동안 미국인들이 소중하게 지켜왔던 보편적 가치와 도덕에 역행하는 부분이 있으니 대놓고 그를 지지한다 말하기 못한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학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표를 받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10% 이하인 지역(카운티)의 80.7%를 가져간 반면, 클린턴은 겨우 19.3% 지역에서 승리했다. 이는 미국의 언론들이 이들의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여론이라는 것은 원래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여론이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생물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1999년 12월 31일 정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녹화 방송을 통해 급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했다. 불과 백여 일 전에 총리가 된 47세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대통령 권한대행에 임명하고, 3개월 뒤에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정치일정을 밝혔다.

3년 전 선거에서 소수의 올리가르흐(과두 지배세력)들을 끌어들여 언론을 장악하고 선거자금을 확보한 덕분에 가까스로 재임에 성공했던 옐친은 취임 후 공기업 민영화의 과실을 선거 공신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나라 전체가 온통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국제통화기금 등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국가는 부도상태에 빠졌고 그의 지지율은 1% 이하로 떨어졌다. 야당의 탄핵 시도는 겨우 막아냈지만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스스로 물러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옐친과 그의 친인척들의 부패 혐의에 대해 일체의 수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여론에 역행하는 조치였다. 거기에다 여권의 대통령 후보인 푸틴을 밀고 있는 정당은 얼마 전 치러진 총선에서 불과 20% 대의 지지밖에 얻지 못한 신생 정당이었다. 공산당 등 야당은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해 쾌재를 불렀고, 특히 지난 선거에서 옐친에게 패했던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는 이미 대통령이 된 듯이 행동했다. 그러나 2000년 3월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주가노프는 중앙정치에 입문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일반인들이 그 존재조차 잘 알지 못했던 푸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86년 3월, 프랑스 역사상 보통선거에 의해서 당선된 최초의 좌파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총선에서 패배하여 다수당의 자리를 야당에 넘겨줬다. 5년 전 집권 이래 은행과 주요 산업을 국영화하고 최저임금을 15%나 인상했으며 거기에다 부유세를 신설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치솟는 실업률과 물가 때문에 여론이 등을 돌린 탓이었다. 다수당이 총리를 맡는 프랑스 헌법에 따라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 즉, 좌우 동거정부가 불가피해졌고, 미테랑은 예상을 깨고 강경보수파 지도자인 자크 시라크를 총리에 임명했다. 다음 선거에서 자신과 맞붙을 것이 거의 확실시 되던 인물이었다.

코아비타시옹에 따라 대통령인 미테랑은 외교와 국방만 맡고, 나머지 모든 국정은 총리인 시라크가 맡았다. 시라크는 외교 영역까지 침범하여 정상회담 자리에 자신의 의자도 놓아달라고 요구했다. 2년 뒤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는데 선거기간 중 시라크는 우세한 여론을 믿고 시종일관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선거의 최종 승리자는 미테랑이었다. 패인은 지난 2년간 국정을 좌지우지 했던 시라크에게는 여당의 실정을 공격할 수 있는 날카로운 칼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6월 대한민국, 18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이른바 ‘호헌조치’에 항의하기 위해서 국민적 투쟁에 나선 것이다. 6월 26일 하루만 해도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개헌과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수습안을 내놓음으로써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정치적 환경은 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해졌다. 그러나 그해 12월 16일 개정된 헌법에 의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승리자는 군인 출신의 노태우 후보였다. 주지하다시피 야당 후보들이 자신의 승리를 자신한 나머지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몰고 온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12일에는 청와대에서 불과 1km 남짓한 거리에서 100여만 명 규모의 군중집회가 열렸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고, 국회가 추천하는 총리를 중심으로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대통령은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수습 방안이 무엇으로 결정되건 중요한 것은 국가 운영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의 정국을 맞아 역할이 부쩍 커진 야당들 입장에서는 책임 있고 성숙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래야만 국민의 신뢰를 얻고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개개인의 정치적 손익계산서에 따라 얄팍하게 처신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과 여당의 난맥상에 기댄 반사효과는 생명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례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글/허구생 단국대 교수·역사학 박사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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