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세계적 위상, 정서적 보호 시스템은 후진적
기획사의 '관리', 무대 밖 사생활까지 침범
한국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은 가요 시장이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독특한 체계다. 사실상 한국을 제외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이러한 체계를 찾아보긴 어렵다. 보통 해외 팝 시장에서는 탁월한 재능이 있는 원석을 발굴해 데뷔시키는데, 국내 기획사는 오디션을 거쳐 뽑힌 연습생들을 수년에 걸쳐 노래와 춤, 연기, 언어 등을 트레이닝 해 데뷔조를 짠다. 이 과정에서 데뷔조에 꼽히기 위한 ‘경쟁’은 필연적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인큐베이팅 시스템’이라고 부르는데, 소위 소속사의 혹독한 트레이닝 기간을 거쳐 키워진 뒤 완벽한 상태로 시장에 나온다는 의미다. 이미 수년의 트레이닝을 거쳐 철저히 교육됐기 때문에 우월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이러한 시스템이 지금의 한류 열풍을 불러 왔다고 입을 모은다.
가수의 앨범 콘셉트부터 어떤 노래를 부를지, 어떤 의상을 입을지도 소속사가 결정하고, 가수는 따르는 식이다. 최근 다수의 아이돌 그룹에서는 스스로 곡을 만들고, 콘셉트를 기획하는 등 주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상 이 조차도 소속사의 큰 기획 아래서 진행되고 있어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또 기획사의 관리 범위는 단순히 무대만 국한되지 않는다. 케이팝의 세계적인 위상에 비해 소속 연예인들에 대한 정서적 보호 시스템은 매우 후진적이다. 여기에 무대 밖 사생활까지 포함된다. 많이 알려진 휴대전화 소지 여부, 연애 문제까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한다. 팀워크와 기동력을 위한 방법으로 정착된 숙소 생활도 결국은 사생활 관리 중 하나다.
지난해 걸그룹 AOA를 탈퇴한 배우 권민아가 연장자이자 팀의 리더인 지민에게 10여 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고 최근 밝혔다. 당시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에도 자신의 상황을 말했으나 귀 담아 들어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번 권민아의 폭로 이후에도 소속사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다가 가해자로 지목된 지민이 사과문을 올린 후에야 지민의 탈퇴 및 연예 활동 중단을 알리는 공식입장만 내놓았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팀 내의 불화가 아닌, 케이팝 산업과 아이돌 육성 시스템의 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경쟁을 통해 뽑힌 엘리트 멤버들을 데리고 호흡을 맞추기 위해 합숙을 시키고, 통금을 정해두고, 휴대전화 등 개인물품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엄격한 규율을 만든다. 혹여 기획사의 통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움직이지 보이면 혼을 내거나, 꿈을 짓밟고 집단에서 내쫓는 형태다.
18세에 연습생 활동을 시작해 보이그룹으로 데뷔한 A씨는 “당연히 휴대전화는 사용하지 못했고, 심하게는 학업에 대한 부분에서도 소속사가 개입돼 소홀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당시엔 연습생 신분이었는데도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아침 9시부터 연습실에 가둬놓고 이르면 그날 자정, 늦으면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연습을 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마치 군인과 같은 삶이었다. 아니 사실상 군대가 더 편했다”고 했다.
이어 “숙소 생활의 장점도 있지만,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방치하면서 이런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면서 “숙소엔 멤버들 외에도 매니저가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 매니저는 우리의 모든 것을 회사에 보고하는데 멤버들의 갈등을 소속사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기획사 관계자들)누구 하나 이 관계를 회복시켜주려고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멤버들 사이에 갈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나중에 문제가 커지면 소속사는 이득이 되는 친구를 남겨두고, 나머지 한 명은 짐을 싸서 나가도록 만드는 식”이라고 했다.
중학생 시절 데뷔해 보이그룹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B씨도 “팀 내에서 한 멤버의 괴롭힘이 정도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그 멤버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다른 멤버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했다. 결국 쌓이고 쌓였던 갈등이 폭발했고, 부모님까지 찾아올 정도로 문제가 커졌다. 그런데 정작 문제를 일으켰던 멤버는 솔로 앨범을 발매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팀이 해체됐다”면서 “회사에서는 문제를 일으켰을지언정 ‘돈’이 되는 멤버를 내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또 “숙소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에게 ‘내 아들처럼 케어하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한참 클 나이에 너무 배고파서 밥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조차도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께서 멤버들 밥 사주라고 돈을 소속사에 드렸던 거다. 그럼에도 난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고, 그 상황에서 연습실에 갇혀 연습만 하는 삶이었다”고 하소연했다.
회사의 사정으로 연습생 시절부터 데뷔 초까지도 숙소 생활을 하지 못했던 걸그룹 출신 C씨는 “다른 그룹들에 비해 자유로웠던 건 사실이다. 대부분의 기획사에서는 잘못된 길로 가는 걸 통제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숙소 생활을 하지만 오히려 내가 속했던 그룹 멤버들은 부모님 밑에서 지내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엇나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특히 숙소 생활은 물론 소속사의 지나친 경쟁심리 자극이 멤버들 간의 갈등을 야기하는 시스템이라고 꼬집었다. C씨는 “최근 걸그룹 멤버들 사이의 괴롭힘이나 갈등이 기사화된 것을 봤다. 걸그룹 활동 당시 한 사람이 우리 그룹을 보고 ‘너무 사이가 좋으면 안 된다. 오히려 사이가 나빠야 그룹이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논리”이라고 황당해 했다.
이어 “자아가 채 형성되기도 전인 나이에 꿈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온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경쟁을 통한 생존을 강요하는 게 회사다. 멤버들끼리 서로를 평가하게 하고, 선의의 경쟁이 아닌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만 내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강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멤버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결국은 괴롭힘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아이돌 출신 가수 D씨는 “기자들을 비롯해 PD, 작가 등을 만나면 명함을 주시는데 어차피 숙소에 가면 그 명함을 매니저가 다 회수해 간다”고 했다. 혹여 개인적으로 취재진과 접촉할 것을 우려해서다. 소속사를 통하지 않고 아이돌 멤버들이 관계자와 친분을 유지하는 통로를 철저히 막았다는 설명이다.
물론 기획사 입장에서는 엄청난 시간과 자본이 투입된 만큼 이들의 성공과 인기 유지를 위해 ‘통제’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지나친 통제는 결국 그들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기에만 좋은 ‘허수아비’로 만들고 있다. 한 연예 기획사 관계자는 “사실 기획사 입장에서는 연습생들을 대할 때 ‘손익분기점’만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투자된 돈이 회수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경쟁을 유도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통제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물론 최근에 아이돌에 대한 지속적인 건강관리, 휴식기 보장 등이 언급되지만 큰 기획사가 아닌 이상 이 조차도 연습생들, 데뷔 초에는 사치라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