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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감독탐구③] 배우 송강호의 "무조건" 신연식 감독


입력 2020.08.16 00:03 수정 2020.08.15 22:05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감독 신연식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감독 신연식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감독탐구 세 번째 주인공은 각본을 쓰는 작가부터 연출 감독, 배우에서 제작자는 물론이고 작사에 작곡까지 영화에 관한 다층적 실력을 겸비한 신연식이다. 매주 누구를 소개할지 고심이 깊은데 이번 주엔 신연식 감독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지난 6월, ‘기생충’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배우 송강호가 신연식 감독의 ‘거미집’을 선택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주역이자 92회 아카데미시상식 4개 부문 수상에 빛나는 ‘기생충’의 주인공 송강호가 할리우드영화도 아니고 국내 대형기획영화도 아닌 문학 소설 같은 작품을 일궈온 신연식 감독의 신작을 차기작으로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 송강호-신연식의 콜라보가 여자배구단과 감독의 이야기를 그린 ‘1승’이라는 영화를 통해 먼저 진행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배우 송강호가 캐스팅되면서 신연식 감독의 블록버스터를 만나는 기회를 기대케 했던 ‘거미집’ 대신 ‘1승’이 오는 11월 촬영을 시작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첫 번째 보도가 나갔을 때 송강호는 곧바로 출연 사실을 인정했다. 두 번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머뭇거리지 않는 인정과 확인, 신연식 감독에 한 배우 송강호의 신뢰가 읽히는 대목이다.


배우 송강호. 영화 '마약왕' 인터뷰 ⓒ쇼박스 제공 배우 송강호. 영화 '마약왕' 인터뷰 ⓒ쇼박스 제공

신연식에 대한 송강호의 무한신뢰는 ‘거미집’의 투자와 사전제작을 위한 정비 기간을 기다리지 않고 또 다른 신연식의 작품을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송강호는 현재 칸 이전에 선택했던 영화 ‘비상선언’을 촬영 중인데, 칸과 아카데미 이후 ‘첫 작품’을 반드시 신연식 감독과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거미집’ 출연 보도 후 영화계에는 “배우 송강호가 ‘거미집’ 시나리오를 읽고 매료돼 단박에 출연을 결정했다. 자진해서 신연식 감독의 다른 시나리오를 요청했으며 다채로운 이야기와 실험정신을 높이 샀고, 복수의 작품 출연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후문이 있었다. ‘1승’ 출연으로 사실임이 확인된 셈이다.


송강호의 선택에 영화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국민배우여서만은 아니다. 국내 최강 티켓파워를 지닐 수 있었던 데에는 연기력만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고르는 안목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치밀하게 선택하고 치열하게 연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배우가 존중을 표하며 협업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감독, 이유가 있다.


영화 '배우는 배우다' 스틸컷 ⓒ㈜NEW 제공 영화 '배우는 배우다' 스틸컷 ⓒ㈜NEW 제공

신연식 감독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cineaste: 영화작가)이다. 이창동 감독이 한 편의 시, 그 심상을 영화로 펼쳐낸다면 신연식 감독은 소설을 읽은 듯한 문학적 감수성에 젖게 하는 영화를 선보여왔다. 때로는 장편 소설 한 권, 때로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여러 편의 단편을 영상으로 만난 충족감을 맛볼 수 있다.


신 감독은 지난 2002년 ‘피아노 레슨’이라는 장편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2005년 ‘좋은 배우’로 상업영화에 데뷔했다. 4년 뒤 그 진심을 의심할 수 없는 안성기 배우여서 가능했던, 늦깎이 총각의 친구 딸과의 사랑을 쓰고 연출하고 제작한 ‘페어 러브’, 다시 4년 뒤 배우 탄생의 비화를 담은 ‘배우는 배우다’ 연출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혔다. 2016년에는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흑백영화 ‘동주’의 각본을 쓰고 제작을 맡아 춘사영화제 각본상을 받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물론, 그 사이 사이에는 주옥같은 영화들을 세상에 내놓았고, ‘러시안 소설’로는 한국영화감독조합이 주는 감독상을 받았다.


신연식 감독의 한국영화계 내 포지션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개성적이다. 독특한 영화를 자신만의 제작 방식으로 만들지만, 독립영화 감독은 아니다. 상업영화 감독이고 장차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감독이지만 흔히 보는 대중의 기호에 맞춘 기획형 상업영화를 만드는 제도권 감독도 아니다. 낯설게 느껴질 만큼 신선한 ‘내용’을 장르와 형식에 연연하지 않는 ‘틀’에 담는 예술영화 감독 또는 예술적 감독이다. 예술영화라고 해서 지루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은 금물. 어릴 적 ‘아라비안나이트’를 천일야화를 처음 읽었을 때, 감기는 눈에도 자꾸만 다음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것처럼 한 작품을 보기 시작하면 다른 영화를 더 찾게 되는,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배우 송강호도 그 힘에 공명했을 것이다.


영화 포스터 ⓒKT&G 상상마당 제공 영화 포스터 ⓒKT&G 상상마당 제공

한 편 한 편, 신연식 감독 영화의 면면을 소개하고 싶지만 그 광폭과 깊이를 모두 설명해 내기엔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다. 맛보기 감상을 시작해 볼까.


‘러시안 소설’은 문학과 영화의 어울림이 근사하다. 영화 속 자막은 소설의 책장을 넘기고 문장을 읽는 느낌으로 우리를 신연식의 세계로 안내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 배운 것 없고 잘 곳도 없는 신효는 소설가를 꿈꾼다. “이런 글을 왜 쓰느냐”는 주변의 야유와 질책에도 흔들림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자동기술문장과도 같은 글을 써나가는 신효다.


당대 최고의 소설가 김기진이 젊은 작가들을 위해 내어준 ‘우연제’라는 작업실. 신효는 입성할 자격이 없지만, 김기진의 아들 성환의 손님이라는 빌미로 우연제에 머물며 다양한 작가들과 교우한다. 성환은 그 누구보다 문학을 보는 안목이 높고 정갈한 문장을 지녔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소설가의 꿈을 꾸지 않는다. 마치 김기진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작가가 될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스스로 냉소적이다. 공장에 다니다 감각적 글솜씨로 소설가가 된 경미, 첫 소설로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지만 아내를 찾아다니느라 절필한 정석, 어른 뺨치는 문학비평으로 신효를 일갈하는 정석의 딸 가림, 신효의 글을 다 외울 만큼 사랑해서 헌신을 다하지만 가장 큰 독이 되는 재혜.


막막해만 보이던 신효의 인생에 서광이 비친다. 무려 27년을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깨어난 것도 기적인데, 천덕꾸러기 소설가 지망생은 전설적 유명작가가 되어 있다. 몸은 50대, 마음은 20대, 마냥 즐기고만 싶은데 인기 소설이 내가 쓴 것과 다르다는 걸 알아버렸다. 누구인가, 소재는 신선하지만 빈약했던 내 문장을 수정해 걸작으로 만든 사람은. 신효는 지금은 잊힌 27년 전 인물들을 찾아 나선다.


영화 '조류인간' 스틸컷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영화 '조류인간' 스틸컷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여러 단편을 묶은 소설집을 한 편의 영화로 옮긴 듯한 ‘러시안 소설’, 등장인물 중 누구를 주인공으로 해도 한 편의 영화가 될 것 같더니 현실이 됐다. ‘러시안 소설’의 첫 장면을 장식했던 안개 낀 호수에서의 낚시, 고기를 낚는지 세월을 낚는지 초점 풀린 눈으로 새가 됐다는 아내를 찾아다니던 정석의 이야기를 따로 떼어낸 영화가 ‘조류인간’이다.


남과 다르게 태어나 인간의 모습으론 살기가 힘들어 새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이 새가 되는 걸 돕는 사람들, 그들을 찾는 가족을 돕거나 대신해 추적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날개뼈에서 날개가 돋아나 하늘을 나는 꿈, 삼계탕을 보며 인간의 조상이 조류일지 모른다고 나래를 펼쳤던 어릴 적 상상이 생각나서일까. 낯선 이야기에 쉽게 동화되어 영화 속으로 빠져든다.


두 마음의 공존을 느낀다. 검증된 방법이 아니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살고 싶어 새가 되려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마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아픔에 이는 공감. 스스로 느끼는 본성과 다른 몸을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트랜스젠더와 그 가족의 고통에도 생각이 닿는다.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의미와 명분 속에 스러져간 사람들, 누군가 목숨 걸고 하는 일에 섣부른 비난은 어리석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영화가 흔히 조명하지 않았던 곳에 카메라를 들여놓고 그냥 지켜보듯 느릿한 시선으로 평범한 일상에서 비범한 이야기를 꺼내는 신연식 감독.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를 알아채도 좋고, 스스로 새로운 메시지를 느껴도 좋고, 메시지와 상관없이 신선한 이야기와 카메라 앵글, 화면의 기법과 색감을 즐겨도 좋다. 어쩌면 내가 새로이 느꼈다고 생각하는 메시지도 신 감독이 이미 단초를 심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관객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열린 텍스트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신연식 감독이라면 가능하다.


영화 ‘로마서 8:37’ 스틸컷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영화 ‘로마서 8:37’ 스틸컷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감독 신연식은 또 용감하다. 영화 ‘로마서 8:37’은 자칫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에 카메라를 들인 이 영화의 바탕에는 인간 세상에서 중요한 종교, 우리 사회 가까이 와 있는 기독교에 깊은 애정이 깔렸다. 타락한 일부 기독교인에 대한 문제의식만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다. ‘러시안 소설’이 소설가들을 통해 우리가 소외계층에 대해 갖는 편견과 멸시, 내 힘으로 얻지 않은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된 사람의 태도에 대해 돌아보게 하듯 본분을 잊고 왕이 된 목사 또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입구일 뿐이다.


루스 이 소니도스, 스페인어로 빛과 소리라는 이름의 제작사를 운영하는 신연식 감독인 것에 비추어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로마서 8장 37절의 말씀에 근거한 영화의 탄생은 운명이자 미션으로 느껴진다. 빛과 소리로 만들어지는 게 영화기도 하지만,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빛을 비추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전하는 게 종교 아닌가. 추악한 세상과 인간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이 인상적이다. 영화에는 소리도 영상도 없는 ‘암전’이 종종 등장하는데, 태초의 공간처럼 머릿속을 비우고 다시 생각을 시작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아는 감독 신연식은 세상에 빛과 소리가 되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감독 신연식의 ‘1승’을 기다리며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감독 신연식의 ‘1승’을 기다리며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배우 송강호와의 첫 번째 작품이 될 ‘1승’, 어떤 결의 영화로 완성될지 너무나 궁금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의 성공도 맛본 적 없는 배구 감독 김우진이 망해가는 어린이 배구 교실을 운영하다 해체 직전의 여자배구단을 맡는다. 딱 한 번, 1승만 거두면 되는 이 남자의 도전, 신연식 감독의 작품인 만큼 그동안 봐 왔던 스포츠 영화의 ‘붕어빵’이 아닐 것은 분명한데 말이다.


“누구나 내 인생의 1승에 대한 아련한 꿈과 기억이 있다. 스포츠 영화를 넘어서 각자의 삶에서 성취하고픈 1승을 떠올리며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한다.”


감독 신연식에게, 배우 송강호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1승’이 되는 영화이기를 고대한다. 해가 바뀌어야 보게 될 영화, 넋 놓고 기다리지 말고 신연식 감독의 과거 작품들을 보며 미리 친해지는 건 어떨까. 시간 없다는 이유는 사양, 36분짜리 ‘과대망상자들’도 무척 재미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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