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장치 설치범들처럼 그날 밤 몰래 파일 삭제한 공무원들
청와대도 수사해 탈원전 정책 진실 밝히고 죗값 치르게 해야
미래에 개봉될 영화 <원전게이트> 첫 장면 - 어느 겨울 밤 긴 코트를 입은 공무원 한 명이 관공서로 보이는 한 빌딩을 향해 걸어가 정문 앞에 선다. 당직을 서고 있는 경비원이 그의 신분증을 보며 문을 열어 주자 처리할 일이 있어 야근하러 왔다고 용무를 밝히고 “수고하세요”라고 가늘게 떨리는 소리로 인사한다. 경비원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느 층에서 내려 <원전산업정책과>라는 팻말이 있는 사무실을 그 신분증 카드로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킨다. 어둠 속에서 삭제(Shift + Delete) 키보드를 반복적으로 누르는 그의 손가락에 카메라 초점이 밀착하면서 영화는 검찰의 조사실로 다음 장면을 옮겨 간다.
검찰이 중대 수사를 착수하고 보니 감사원장 최재형의 결단과 뚝심이 새삼 돋보이고 있다.
그는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많은 국민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최근 해군 장학기금 3000만원을 쾌척해 신문에 난 6.25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 93세 최영섭 해군 대령이 그의 부친이다. 그는 고교부터 대학까지 7년 동안 교회에서 만난 소아마비 친구를 업어서 학교에 같이 다니고 사법시험에 나란히 합격한, 어린이 교육용 도덕 교과서에 실릴만한 ‘위인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재형은 지난 달 국회에서 “감사원장이 되고서 이렇게 (피감사자들의) 저항이 심한 것은 처음 봤다. 자료 삭제는 물론이고, 사실대로 말도 안 했다. 사실을 감추고 허위 자료를 냈다”고 증언했다. 이 충격적인 폭로는 20일 후 정부의 월성 원전 1호기 폐쇄 타당성 조사 관련,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검찰 수사를 예고하는 프롤로그였다.
엊그제 대전지검이 산자부, 한수원 등의 전현직 고위 간부들 사무실, 자택, 휴대전화를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한 월성 원전 수사 착수는 최재형이 분노해 국민 앞에 공개한 정부 당국의 이 은폐 행위가 시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정의와 이익을 위해 범법자를 색출해 내고 기소하는 일을 해야 할 검찰로서 당연한 판단이었으며 다수 국민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을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2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1년 후 결국 스스로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 호텔 민주당 전국위원회(한국의 중앙당사 선거대책본부 격) 사무실 침입 및 도청 장치 설치 사건 수사도 미국 정의부(US Justice Department)가 했다. 정의부는 곧 법무부이며 미국 연방 검찰 조직은 법무부 이름으로 돼 있다.
우리는, 트럼프 이후에는 좀 퇴색되긴 했지만, 미국의 이러한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연방 검찰과 FBI(연방 수사국)에 부러움을 보내면서 지향해야 할 모범으로 생각해 왔는데, 우리 검찰이 이처럼 용기 있게 살아 있는 권력, 즉 정부 중앙 부처와 대규모 정부 투자 기관, 나아가 청와대까지 수사하려는 결기를 보면서 뿌듯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사안의 성격상 청와대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고 필요한 수사는 해야만 할 것이다.
감사원장 최재형이 밝혀낸 그들의 행위는 앞으로 정권이 바뀐 뒤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충분한 요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신분이 중앙 부처 공무원들이고 시간이 밤이며 장소가 행정부의 중요 결정과 집행이 이뤄지는 정부 청사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시류에도 맞는 컴퓨터 파일(갯수도 미리 숫자를 맞추기라도 한 듯 444개다) 삭제인데, 그 파일과 관련된 돈의 액수가 수백조원에 이른다.
대통령 문재인이 방사능 유출 공포를 소재로 한 픽션 영화 <판도라> 등에 영향을 받아 대선 공약이 되고 취임 후 1개월 만에 그 이행 작업이 전격 착수된, 문재인 정권 핵심 국정 의제인 탈(脫) 원전 정책은 에너지 전문가들을 비롯해 많은 국민들로부터 반대와 우려를 일으켜 왔다. 멀쩡한 원자력 발전소를 조기 폐쇄하고 경제성과 안전성이 검증된 원전의 가동과 추가 건설을 중단해 풍력과 태양광 발전 등으로 대체시킴으로써 발생하는 국가적 손실이 513조원에 이른다는 전문가의 진단도 나왔다.
카이스트 교수 정용훈이 이를 계산해 작성한 논문 <탈원전 비용과 수정 방향>은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정기 간행물에 실렸으나 그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됐다. 이 또한 대통령의 탈원전 밀어붙이기를 위한 정부 모든 기관들의 알아서 기기 또는 직간접 압력에 의한 왜곡, 은폐 행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월성 원전 즉시 폐쇄의 타당성 결론을 내기 위해 계속 가동시 이득액 약 4000억원이라는 원래 보고를 그 5%에 불과한 200여억원으로 줄이는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나랏돈을 운용하는 공복(公僕)이라면 돈 100만원도 허비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요구될진대, 20년 더 원전을 국가 에너지원으로 계속 쓸경우 513조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아끼게 되는 쪽을 일부러 버린 공무원들은 반드시 찾아내 그 죄를 물어야만 한다. 그 공무원들이 저 위 누구로부터 압력을 받아 할 수 없이 그런 무모한 세금 낭비와 은폐, 왜곡이라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 직간접 압력 행사자들을 반드시 밝혀 내 더 크게 죗값을 치르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감사원장 최재형은 이 중대한 역사적 죄상을 국회 요구로 감사하는 데 성공했고, 20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검찰에 참고자료로 보냈다. 수사 의뢰는 하지 않으면서도 검찰이 인지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검찰이 법리 검토까지 마친 자료를 받고 감사 보고서가 아닌 수사 보고서 같았다고 말한 대목은 매우 시사적이다. 감사원 선에서 이미 범죄 사실이 충분히 확인됐다는 얘기다(판사가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들을 거의 100% 발부한 근거다).
대전지검은 이를 사법적으로 마무리하는 작업에 과감하게 손을 댄 것이다. 지검장 이두봉은 이준 열사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수사 실무 책임자인 형사부장 검사 이상현과 함께 서울중앙지검에서 현 검찰총장 윤석열이 중앙지검장일 때 각각 차장과 부부장으로 일한 이른바 ‘윤석열 사단’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대전지검의 수사는 윤석열의 격려 방문 1주일 후에 결행됐다. 그래서 민주당 대표 이낙연과 친문 패거리들은 이들의 수사를 정치인 검찰총장 윤석열의 조종에 의한 정치 수사, 검찰권 남용이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정치군인의 정치 개입, 검찰 쿠테타라고까지 흥분하며 그 불길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법무부장관 추미애는 검찰총장의 특수활동비가 주머닛돈처럼 쓰이고 있다며 감찰을 지시하는, 그녀 특유의 치졸(稚拙)을 보이고도 있다.
기관장의 활동비란 자신의 ‘꼬붕’ ‘똘마니’들을 챙기기 위해 술이나 사주고 용돈이나 줄 수 있도록 허술하게 운영되는 돈이 아니라는 건 정부 기관에 근무했거나 큰 민간회사에서 일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 돈은 뇌물 아니면 협찬이나 받아야 사용 가능한 것이다. 기관장의 공식 활동비는 회의나 아랫사람들의 업무 보조(격려) 비용으로 나간다. 추미애는 그걸 알면서도(자신도 법무부장관으로 연간 수십억원의 활동비를 쓴다) 마치 커다란 비리라도 있는 것처럼 감찰을 지시한 것이다.
이번 검찰 수사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인사들과 권력의 중심 의제를 표적 삼고 있으며 전격적으로 전방위 압수수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조국 수사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래서 민주당 대표 이낙연은 조국 수사를 연상시킨다며 이번 사태의 파장을 크게 걱정하며 겁을 먹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조국 일가 수사는 조국이 차기 유력 대선 주자라는 인물적 비중은 컸지만, 범죄 내용이 개인적인 위선, 내로남불, 입시부정, 사모펀드 의혹 등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이번 원전 수사는 그 국가적 피해 규모로나 관련자 범위 등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수사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을 익히 알고 있을 집권 세력이 앞으로 어떻게 선제 조치를 취하고 방어하느냐에 따라 정국은 요동을 치게 될 것이다. 윤석열 해임,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에 의한 윤석열 수사(죄목은 검찰총장으로서의 정치 행위 등이 유력), 아니면 후유증 염려로 이도저도 못하고 수사를 지켜보는 것 등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어느 쪽이 되던 문재인 정부는 격랑에 빠져들게 돼 있고, 그래서 검찰 수사에 국민들의 눈과 귀가 그 어느 때, 어느 사건보다 날카롭게 쏠리고 있다.
글/정기수 자유기고가(ksjung72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