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미국 상원에서 한국 독립 결의안 통과됐지만 기록으로만 남아
제임스 D. 펠란 통해 상원 움직인 이유와 한국 독립 영향 살펴봐야
1919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한국인의 자결, 즉 독립에 대한 미국 상원 결의안이 발의되어 통과된다. 발의자는 제임스 D. 펠란(James D. Phelan)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이 결의안은 통과되었고, 독립운동가들과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봤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인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에 빈곤한 재정 상태에서도 상당한 예산을 미국 상원 로비에 투입했다. 그러나 미국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의안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았고, 오히려 이후 일본의 한국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왜 미국 상원만을 바라보았고, 백인 우월주의자인 제임스 D 펠란은 어떤 인물이기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결의안을 발의했을까.
미국의 정치 구조는 독특하다. 300명의 국회의원이 있는 한국과 달리 상‧하원이 존재한다. 미국 대통령을 결정하는 선거인단은 미 국회 상·하원 의원을 합친 수에, 수도 워싱턴의 선거인단 3명을 포함한 것이다. 그래서 현재 미 선거인단의 수는 538명이다. 상원은 각 주를 대표하는 성격으로서 2명으로 고정된 반면, 하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결정된다. 상원은 조약 비준 등 대외적 문제를 중심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하원은 예산 비준 등 주로 미국 내 문제를 중심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구조다.
트럼프의 반발로 진흙탕 선거가 되어버린 미국 대선이지만, 이런 길고 긴 과정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이런 독특한 미국 정치의 구조를 재미있게(?) 바라봤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이 구조를 집어넣으면 ‘재미’는 ‘한숨과 통탄’으로 바뀐다.
‘대외적 문제를 중심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상원의 역사는 1919년 한국 독립을 청원하던 미주 한인의 타깃이었다. 미주 한인들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폭압적 지배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줄 수 있었고 이러한 활동에 많은 미 상원의원이 공감했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제임스 D. 펠란의 독립에 대한 발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도 당시 한인들은 미국 상원이 자신들의 뜻을 알아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현실 간의 간극은 처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이후 미국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듯, 이승만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는 다양한 형태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였다. 미국 상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상원은 한국의 독립 청원이 계속 이어졌음에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에게 있어 10년 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은 여전히 ‘은자의 나라’였다. 어떤 미 상원의원은 투표권도 없는 한인의 독립 문제를 왜 논의해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많은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한인의 청원까지 논의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일부 미 상원의원이 일제의 한국 지배와 3.1운동 과정에 나타난 일본의 폭압적 탄압 정책을 문제 삼았지만, 그 배경은 미국 내 반일감정에 있었다. 이를테면 3.1운동 당시 일본군의 만행 중 대표적인 ‘제암리 학살 사건’ 역시 일본군이 교회에 기독교인을 가두고 불태웠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미국에 제암리 학살 사건을 폭로한 기독교 연합회의 보고서는 의도적으로 희생자 중 상당수가 천도교인이라는 점을 감추었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미국 기독교 사회, 특히 태평양을 두고 일본과 마주한 미 서부 지역의 배일 감정을 자극하였다. 20세기 이후 미 서부 지역의 백인들은 태평양을 더 이상 방벽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인을 학살한 일본이 전함을 이끌고 무방비의 미 서부해안까지 한순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일본의 팽창과 반기독교 정서에 대한 불안감과 때문에 미 서부 지역의 백인 사회를 중심으로 반일여론으로 퍼져나갔다. 투표권을 의식한 미 상원은 결국 이에 대해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투표권을 빌미로 미 상원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도록 강요하였고, 그 결과가 미 상원에서 결의안의 통과라고 할 수 있다.
결의안이 일본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파나마 운하와 워싱턴 회의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더욱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한 상황에서 결의안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 우린 다시 제임스 D. 펠란이란 인물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왜 미국 상원이 움직였는데, 한국 독립에는 득이 되지 않았는지 설명이 된다.
그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이었다. 당시 백인 주류 사회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는 ‘실패한 백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이로 인해 공공연히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 서부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은 뒤, 그들은 오히려 중국인 배제법 같은 적극적인 유색인종 차별정책을 추진하였다. James D. Phelan은 이러한 법안에 찬성하는 인종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로 행세하였고, 1920년 상원의원 선거 당시 그의 선거 구호가 ‘캘리포니아의 백인을 지키자’ (Keep California White)였을 정도였다.
그의 인종주의적 배경은 역시 이른바 ‘황화론’(Yellow Peril)이라 불리는 ‘동양인 위협론’이었고, 특히 중국인과 일본인이 차별 정책의 대상이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시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도시에 전염병이 확산하자, 그 원인으로 중국인을 지목하였다. 심지어 퇴임 당시 연설에서 ‘동양의 질병으로부터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가족 단위로 세탁업 등에 주로 종사하던 종래의 중국인과 달리 한인을 포함한 일본 이주민은 미국에서 토지를 경작하며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이것을 일본이 이주를 이용한 일종의 미국 침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른바 ‘40년 주기설’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일본인이 40년간 정착할 경우 3대까지 자리 잡아 일본인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결국 캘리포니아가 일본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이처럼 철저한 인종주의자였던 그가 한국의 독립을 상원에서 발의한 이유는 일본의 폭압적 지배하에 있던 한국의 상황을 동정하거나 한인의 청원에 공감해서가 것이 아니었다. 한국이 독립하면 일본의 팽창을 억제하고, 배후를 위협할 수 있어 미국의 대일 정책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다만 이상한 믿음이 이를 방해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분명한 것은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격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이다. 우리 역시 그러하듯 미국 정치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국익과 국민의 지지일 뿐이다. 이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바뀌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이상한 믿음을 갖고 이 당연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