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2017) 개봉 즈음이다. 김용화 감독에게 문득 영화 ‘국가대표’(2009)에서 방 코치(성동일 분)의 딸, 수연을 연기했던 배우 이은성에 관해 물었다. ‘국가대표’가 마지막 출연작이기도 했고, 촬영현장에서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배우 이은성을 좋아했기에 이제는 볼 수 없는 아쉬움에서 건넨 질문이었다.
김용화 감독은 담담히 당시를 회상했다. “당차면서도 예의 바르고, 보기 드물게 깨끗하고 매력 있는 마스크를 지닌 배우였어요. 연기도 과하지 않게, 잘했고요. 극 중에서 직업으로 옥장판을 파는 설정인데, 어린 배우에게 좀 꺼려지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그런 게 없더라고요.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 수연에게 잘 어울렸고, 수연 캐릭터가 더 살았어요”.
“예의 바르다는 게 어떤 거냐면. 강원도 평창에서 한창 촬영 중이던 어느 날 은성 씨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쭈볏쭈볏하더라고요. 어렵게 입을 열더니 뮤직비디오 섭외가 들어왔는데, 촬영장소가 서울이라 고민이라고, ‘안 되겠지요?’ 하는 거예요. 제가 안 될 게 뭐 있느냐, 기회가 되면 어디든 가야지, 촬영일정을 조정하겠다고 말했지요”.
이제 스무 살 갓 넘은 신인 배우, 주연 아닌 조연을 위한 배려에 적잖이 놀랐다. 역시나 따뜻한 마음을 지닌 김 감독에게 엄지를 세우자 “아휴, 당연한 일이죠”라며 손사래를 쳤다. 김용화 감독은 이어 “무심코 물었어요, 그런데 가수 누구? 물어도 되나? 했더니 조심스레 ‘서태지요’라고 답하는 거예요. 제가 누구? 아니 그럼 뭘 망설여 무조건 가야지.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응원했죠”라고 말했다.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설렘과 흥분이 9년이 지난 후에도 묻어났다.
사실 영화 ‘국가대표’와 노래 ‘버뮤다트라이앵글’ 뮤직비디오의 촬영 연도가 같아 영화 촬영 전이나 후쯤에 서태지와 이은성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겠구나, 짐작만 했는데 놀랍게도 촬영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문화 대통령’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 인지도도 상승하겠지만, 보통 깐깐하게 퀄리티 따지며 제작할 게 아니니 배우로서 좋은 경험이 될 건 자명해 보였을 터. 하지만 사랑으로, 결혼으로 이어질 줄은 누구도 몰랐을 일이다.
배우 이은성을 좋아한 이유는 여럿인데, 우선 독특한 얼굴에서부터 압도당했다.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한 중성적 매력, 현실의 사람 같기도 판타지 속 인물 같기도 한 경계인이 주는 신비함, 오뚝한 콧날에 배우 한지민에게도 있는 작은 진주라도 박힌 듯한 코끝, 도톰한 입술 끝에 자리한 환한 보조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쌍꺼풀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눈. 비밀을 가진, 어려움 속에서도 밝고 씩씩한, 재벌과 재투성이를 모두 담을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외모다.
연기도 좋았다. 김용화 감독의 말처럼 과하지 않게, 그러나 제 몫은 분명히 해내는 똑순이였고 뭔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지는 연기였다. 드라마 ‘반올림’도 좋았지만 ‘얼렁뚱땅 흥신소’에서 선배 예지원과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모습, 재벌의 외형은 갖췄으나 정체를 알 수 없고 뭔가 비밀을 지닌 것 같은 은재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전 영화 ‘다세포 소녀’에서 여장 남자 두눈박이를 연기했을 때부터 자꾸만 눈길이 갔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원천은 여럿이다. 배우로서 일가를 이루는 일과 자연인으로서 엄마로 아내로 사는 일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 우주의 기적과도 같이 짝을 알아보고, 함께 아이를 만들고, 아이가 자라며 보여 주는 우주 이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잘 안다. 배우 시절 어떤 보람과 고통을 느꼈는지 잘 모른다, 현재 얼마큼 만족스럽고 행복한지도 잘 모른다. 다만,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일일까, 선을 넘는 오지랖을 부리는 것은 그만큼 배우 이은성이 ‘다음 장’을 보고 싶어서다. 배우 이은성과 너무 일찍 헤어졌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이니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꼭 보고 싶다, 배우 이은성을 잊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