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해 보여서 옴파탈(‘치명적 남자’라는 뜻으로, 영화 등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의 매력이 덜한 배우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제이크 질렌할이다. 동의할 수 없다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배우 커스틴 던스트, 나탈리 포트만, 레아 세이두, 레이첼 맥아담스에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까지 공식, 비공식으로 열애설이 제기된 스타가 몇 명인데 무슨 헛소리냐는 이의제기일 것이다.
맞다, 잘생겼고 연기 잘하고 스타들과 짧고 굵게 만나기로 유명한 남자 배우다. 분명 작은 얼굴에 몸은 헐크처럼 좋고, 매력적 미소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순간, 골똘히 상대를 쳐다볼 때면 눈빛이 멍해지고 어정쩡한 미소를 지을 때면 입이 저렇게 크고 입술이 저렇게 얇았나 싶은 모습이 되면서 꽃미남 미모는 온데간데없다. 더욱 순해 보이고 선량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옴파탈 면모는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선지, 개인적으로 제이크 질렌할이 멋져 보이지 않았고 연기도 늘 2% 부족해 보였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옴파탈로 보인 영화가 있다. ‘러브 & 드럭스’(감독 에드워드 즈윅, 수입·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 2010)이다. 세상 모든 여자가 그에게 반하고 그의 꼬임에 넘어가는 남자 제이미 랜들 역을 맡았는데, 물 만난 고기 마냥 팔딱거리며 연기하는 데다 제 옷을 입은 것처럼 너무 현실감 넘쳐서 고개가 ‘천하제일의 작업 선수’라는 설정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 2011년 개봉 당시 처음 봤을 때는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대놓고 화이자의 약품 두 종류를 홍보하는 영화에 톱스타 배우들이 출연한 점, 두 번째는 앤 해서웨이(매기 머독 분)가 이 정도 상업영화에서 이토록 심한 노출을 했다는 것이었다. 10년이 지나 다시 보니, 제약사와 약품에 대한 홍보가 세 번째 주인공으로 들어가고도 주제의식을 잊지 않고 영화가 산으로 가지 않은 게 놀랍고, 대규모 투자지원으로 고액의 출연료가 산정됐다면 톱스타가 주인공인 게 당연하고, 불치의 병에 걸려 섹스와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캐릭터를 맡고서 노출을 거부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겠구나 싶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해서 완성된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로 평작 이상이고, 주연을 맡은 앤 해서웨이와 제이크 질렌할이 아름다워 보이고 둘의 어울림도 어여쁘다는 사실이다. 두 배우는 매우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관계의 시작부터 열정의 폭발, 갈등부터 헤어짐, 그리고 재회를 연기했다.
어찌 보면 제이미와 매기는 ‘정신적 쌍둥이’ 같은 인물들이다. 이성과의 잠자리에 거침이 없고, 공백기 없이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관계가 이어진다. 그렇다, 성관계다. ‘교제’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너무 가벼운, 지속성과 교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남녀관계다. 아니, 서로 사귀게 될까 봐, 복잡해질까 봐 꺼린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육체적 욕망을 시원하게 나누는 관계다. 스스로들 표현하는 것처럼 뼛속 깊은 속물이고 바람둥이다.
모든 건 영원하지 않다. ‘선수’와 ‘선수’가 만났다 해도 매기와 제이미 사이의 ‘쿨(cool) 함’이 영원할 수 없다. 누군가 먼저 마음에 다른 ‘싹’이 자란다. 사귈 수 없고, 질척해지는 순간 끝이라는 전제는 사귀고 싶고 깊이를 가지고 싶은 바람을 낳는다. 둘 중엔 제이미가 그랬다. 먼저 음식을 사서 매기의 집으로 갔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렀다.
흔히 이렇게 얘기하기 쉽다. 매기가 파킨슨병이고, 제이미는 신체 건강한데 제이미가 먼저 교제를 원하면 해피엔딩 아닌가. 매기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아니다. 나의 선의가 언제나 상대에게 좋은 일이 되지 않는다.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악의가 없다 해도 그것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매기는 잠깐 몸을 나누고 바로 등을 돌려 일상으로 복귀하는 쓸쓸한 만남이어도 동등할 수 있는 관계가 좋았다. 점차 자신이 상대에게 짐이 되는 관계를 원치 않았다.
둘은 매기의 의지로 헤어졌고, 제이미 또한 받아들이고 다시 환락의 세계로 돌아갔다. 서로 만나지 않았던 그때 그대로. 그런데, 진짜 그런 일이 가능할까. 두 속물이자 바람둥이,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 없는 제이미와 고양이에게 딱 한 번 한 적 있는 매기가 이미 서로에게 “사랑해”를 절로 고백한 뒤다. 절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힘들고 상대를 내 인생 안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두 사람이 잠시나마 ‘하나’가 됐었다.
사견임을 전제로, 영화 ‘러브 & 드럭스’의 장점은 나밖에 모르는 두 이기적 인간이 사랑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원래 생긴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난다. 다만 바뀐 게 있다면, 세상 사람 누구나 나처럼 ‘나만 신경 쓰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 저절로 신경 쓰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서로가 상대의 생긴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는 게 바로 ‘사랑’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영화 ‘러브 & 드럭스’의 단점은 제목이다. 거대 제약사가 세 번째 주인공이라 제목에 ‘드럭스’(drugs)가 들어갔다고 장담하진 않겠다. 다만 원제 ‘Love And Other Drugs’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각자 다른 이유에서지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었던, (별다르게 짧게 줄일 말이 신통치 않아) 두 바람둥이에게는 다른 어떤 약(혹은 마약)보다 사랑이 최고의 처방전이라는 주제의식이 원제에는 담겨 있다. 인생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약,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 만큼 중독성 강한 사랑, 당신은 오늘도 복용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