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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나희 순정②] 정병각 감독이 알려주는 원작 스토리툰과의 차이


입력 2021.12.07 15:06 수정 2021.12.07 22:57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마가리, 그곳에 가고 싶다 ⓒ이하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흥행을 목표로 각종 재미 요소를 결합한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는 요즘, 오랜만에 감독의 숨결이 느껴지는 영화가 우리 앞에 왔다. 시를 쓸 수 없는 시인과 입만 열면 시 같은 말이 새어 나오는 농부의 얼떨결 동거담, ‘싸나희 순정’(제작 시네마 넝쿨·인베스트 하우스,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이다.


감독을 인터뷰하고 싶은 이유야 한 가지가 아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심상을 한 편의 영화로 펼쳐낸 감독이다 보니 꼭 얘기 나누고 싶었다. 친구와 나누는 수다 같았던 이야기를 가능한 그대로 전한다.


도라지꽃 같은 배우들, 박명훈을 시작으로 캐스팅의 매듭이 풀렸다 ⓒ

- 캐스팅이 기막혀요. 영화 보면서 저도 모르게 ‘와, 이건 선물이다. 축복인데’ 소리가 나올 만큼 제격의 배우들이, 너무 좋은 배우들이 캐스팅됐더라고요.


“저예산영화잖아요,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예술영화지원사업 지원작으로 선정돼서 제작의 첫 단추가 끼워졌는데. (캐스팅) 힘들었죠, 기대는 높으니까 톱스타부터 죽 청해 봤는데, 다 까이는 상황이었어요(큰 웃음). 다행히 영진위 지원작에 대한 매니지먼트사들의 관심이 있더라고요. 그런 맥락에서 에이스 팩토리 부사장에게 시나리오가 전달됐는데, 박명훈 전석호 배우들이 속한 회사예요, 두 배우가 시나리오를 좋게 봐서 합류하게 됐어요. 저야 당연히 OK(오케이)였지요.”


“(이후 영화의 공동제작을 담당하기도 한 에이스 팩토리) 천상현 부사장이 캐스팅 디렉터로 나서 줬어요. 자기 소속사 배우는 아니지만, 김재화 배우를 추천했는데 말할 것 없이 아주 좋았고요. 최대철(택시기사 칠교 역), 최대성(갑골할매 아들 판석 역) 배우는 박명훈 배우가 소개했어요. 연극 동료였다 하고, 박 배우가 놀면서 재미있게 해 보자! 의기투합을 제안했는데 다행히 모두 오케이 해서 함께하게 됐어요.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 사장 역으로 심은진 배우에게 컨택 했는데, 마침 박명훈·최대성과 연극을 한 적이 있다면서 흔쾌히 오케이해 줬어요. 알다시피 저예산이라 돈도 많이 못 줘요, 고창인데 왔다갔다 시간도 많이 할애해야 했어요. 그런데 다들 좋은 마음으로, 특히나 최대철 배우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마다 않고 스케줄 조절해서 먼 길 와 줬어요. 모든 배우에게 고마운데, 또 막상 오면 자기 역할 다 따먹잖아요, 좋은 배우들이니까. (캐스팅) 처음에는 헤매다가 짱짱하게 완성됐어요, 감사한 일이죠.”


낭만적 유 씨를 따라 순정파 원보 씨를 만날 수 있는 영화 ⓒ

- 시인 유 씨(이하 유씨, 영화에서는 성이 아니라 이름처럼 불린다. 전석호 분)와 원보(박명훈 분), 두 사나이 영화인데. 원보가 좀 더 ‘싸나희 순정’을 지닌 인물로 보입니다. 유씨가 잊었던 순정을 되찾아가는, 혹은 새로이 원보를 닮아가는 과정으로 보이는데요. 사실 처음엔, 원보가 더 영화 제목에 가까운 인물인데 ‘왜 전석호 먼저 이름이 나오지’ 했어요. 보다 보니 원보의 순정은 발견되어야 맞다, 주인공 시점이면 오글거리겠구나, 유씨라는 관찰자이자 동참자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어떤 배경이 있을 듯한데요.


“원작이 있는 작품이잖아요, 영화도 그와 구조가 같아요. 원작이 1인칭 시점의 시인이 쓴 형태의 이야기예요, ‘시골에 갔는데 이런 주인아저씨가 있어, 황당했어!’ 식으로요. 영화는 조금 다르죠. 처음엔 시인 시점으로 시작하는데 나중엔 독자적으로 원보 시점으로 갔어요, 시인으로만 풀기엔 한정적이어서요. 표면적 주인공은 유씨, 이면의 주인공은 원보로 그린 건데 표면과 이면의 이중성을 관객이 알아주시겠지 하며 그냥 뒀어요. 그래서 전석호 이름이 먼저, 박명훈이 나중 나오게 된 것입니다.”


- 23년 만에 영화를 만드신 거예요. 어떤 걸로 할까 고심이 있을 수밖에 없고, 원작을 고른다 해도 숱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SNS에 연재됐던 류근 시인의 글, 퍼엉 작가의 그림이 보태져 동명의 스토리툰으로 완성된 ‘싸나희 순정’을 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원작이 상업영화 과(科)는 아니죠. 근데, 매력 있더라고요. 두 캐릭터가 너무 매력 있고, 류근 씨의 대사가 ‘재치 발랄’하잖아요. 묘사가 아주, 나는 B급 감성으로 쓰겠다 하고 고급 감성 다 빼버려서 생동감 있고 좋아요. 상업적으로 풀어볼까도 했는데 원작자가 반대해서 저도 긍정하고 다 수용했어요. 원작은 시인이 쓴 이야기라, 소설을 쓰던 분은 아니다 보니 영화적 구성을 위해 사건이나 인물의 특성, 스토리를 새로 만들어 넣었어요.”


“슈퍼마켓 하는 영숙(김재화 분), 칠교, 판석은 새롭게 설정했고. 갑골할매는 원작에도 있지만 이름만 나오는 수준이라 관련 이야기들을 만들어 넣었어요. 카페 사장도 성격이 바뀌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었죠. 영균이랑 할아버지, 엄마, 아빠는 제가 새로 만들어 넣은 인물입니다. 그래도 원작의 덕이 크죠. 원보와 유씨 대사 너무 좋잖아요, 특히 원보의 주옥같은 대사들은 류근 시인이 쓴 그대로입니다.”


아름다운 고창,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

- 영화 속 배경이 너무 아름다워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고 힐링을 주는 작품이다 보니, 장소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셨을 것 같아요.


“원작으로는 사계절이 나와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안 유씨가 엄청난 술을 마셔요(웃음). 저예산영화다 보니 여름으로 한정했어요. 원작은 배경이 충청남도예요. 제가 당시 충청남도 영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해충돌 문제들에 마음이 쓰여서 (피하게 됐어요). 지역을 알리는 영화를 찍으면 지원금이 나오는데 조심스럽더라고요. 그전에 전주영상위원회에서 일했던 터라 그 고장을 좀 아니까 전주로 가자, 했지요. 충남에도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전북에도 많아요, 전남은 다르지만 (충남이) 전북과는 사투리가 약간 비슷한 점도 있고요. 뽕밭(영화에서 원보가 비바람 맞는 뽕나무들을 붙들고 함께 울어주고 안아주는 장면이 있다) 많은 곳, 부안도 있어요. 여기로 할까 고심하다 다른 여러 지역도 찾아봤는데, 고창도 둘러보게 됐어요. 깜짝 놀랐죠, 고창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에요, 여기다! 했죠.”


- 도라지꽃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신 것만 해도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지상의 꽃만 예쁜 게 아니라 땅 아래로는 도라지를 품고 있어 덕이 큰 풀이에요. 외국 꽃도 아니고 우리 꽃이고, 영화 속 사람들도 그를 연기한 배우들도 다 도라지꽃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고요.


“도라지꽃은 원작에서도 시작이에요. 시인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홀릭 되어(빠져들어) 도라지꽃밭으로 들어갔다고 나오죠. 저는 여기에 보태 시를 통 못 쓰던 유씨가 드디어 글을 쓰게 되는데, 정제된 시까지는 아녀도 도라지꽃과 마을 사람들에 관한 산문을 쓰게 되면서 글이 트이는 장면으로 연출해 봤어요. 또, 원작은 도라지꽃 같은 사람 원보를 보여주죠. 저는 도라지꽃, 원보의 연장선에서 마을 사람들 하나하나 인물을 설정하며 다 같이 도라지꽃 같은 사람들이 되도록, 모두가 하나로 되게 만드는 데 정성을 들였습니다.”


진정한 '싸나희 순정'은 무엇일까. 오늘에 충실하게 하는 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애정 ⓒ

- 요즘 각박한 눈으로 보면 유씨의 결정, 원보에게 돌봐야 할 할배와 키워야 할 어린이를 안기는 게 현실적 부담일 수 있는데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것으로 영화 안에서 잘 풀어내셨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의 마음에도 원보의 ‘순정의 세계’ ‘뽕밭의 세계’ ‘싸나희 순정’이 자리 잡아서 그 결정이 아름답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동심과 순정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이 영화의 의미이고, 영균이 가족 얘기를 통해 영화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더 확장되는 게 또 다른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먼저 얘기하신 것처럼 영균네 가족은 새로이 창조된 인물이다 보니, 결말을 향해 가는 큰 그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싸나희 순정’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영화에도 나오지만, 미래 따위보다 순간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오늘이 소중하다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저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대에게 쏟는 애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원보도 본전 생각이 나서, (오랜 시간 마음과 정성을 쏟은) 홍 감독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니 속상해 하죠. 애정을 쏟는다지만 얼마나 어려워요. 그래서 그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도 담았죠,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끙끙 앓았어요. 그럼 진정한 순정은 뭘까, 표면의 순정뿐 아니라 내면의 순정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아이를 생각하게 됐어요. 동네 낙서나 하고 하나뿐인 친구 다치게도 하고 할아버지 속만 썩이는 천덕꾸러기인데, 칠교도 슈퍼 하는 영숙이도 한마음으로 보살펴요. 영균이 아빠의 모든 초등학교 동창들이 영균이 아빠 엄마예요. 노동운동 하다 분신자살, 특이한 케이스지만 어디든 있을 수 있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도 그런 사연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엄마도 비난만 할 수 있나요, 돈 벌러 간 거죠. 그런데 (그 사회적 상처를) 온 마을이 하나가 되어 살펴요. 정말 도라지꽃처럼 아름다운 사람들, 순정이죠.”


- 가족의 고리가 약해지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한 현대사회, 가족의 의미를 우리에게 묻는 영화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가치 면에서나 시기적으로 의미 있는 질문이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떤 가족’이 제71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비롯해 고레에다 감독은 가족에 관한 질문을 계속해서 해왔는데, 등장인물의 특성이나 관계 구조가 이미 그러한 주제를 잉태하고 있기도 합니다. ‘싸나희 순정’은 그쪽으로 흐리리라 생각지도 못하고 순정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맞닥뜨리게 만나게 되어선지 더 자연스럽게 접근이 됐습니다. 싸나희 순정, 가족, 모두 담고 싶은 주제였나요. 아니면 가족을 향해 가는 과정과 필연에 싸나희 순정이 있을까요.


“일본 영화를 얘기하지 않아도 가족 문제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 송해성 감독의 ‘고령화 가족’(2013) 등을 통해 우리 식으로 계속해서 문제 제기되고 심화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싸나희 순정’은 가족의 의미를 향해 달려간 영화라기보다는 진정한 순정이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의 끝에서 만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해석하는 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도 가능한 것이고 좋게 봐주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휴식이 필요한 당신에게 너른바위가 되어 줄 영화 '싸나희 순정' ⓒ

우문을 하고 현답을 들으며 생각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쏟는 애정, 혈육이 아닌데 진정 가족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순정이 또 있을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다 못해 잃어버린 동심, 순수하게 상대를 아끼는 정을 회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는 도라지꽃의 아름다움과 뽕나무의 아픔을 알게 되고, 내 가까운 이웃의 속마음을 살피는 성숙도 있을 터이다.


그 길이 어려워 보인다면, 영화 ‘싸나희 순정’의 원보 씨와 마가리 사람들을 만나보자. 세상살이 이것저것 다 잃고 피폐해졌던 유씨가 그러했듯 우리도 나의 변화와 회생의 ‘시작 단추’를 누를 수 있을지 모른다. ‘싸나희 순정’은 우리가 마음을 줄 상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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