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촬영할 때 배우 옆에 와서 큰 눈을 껌뻑이며 지켜본다고 한다. 본 적 없는 그 풍경이 꼭 본 것처럼 뇌에 영상으로 저장돼 있다. 합성일 것이 분명한 장면의 영향인지 감독의 영화들에서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찾아본다.
‘윌리를 찾아라’ 같은 숨은그림찾기 게임도 아닌데 재미가 쏠쏠하다. 어떤 영화에선 찾고 다른 영화에선 찾지 못한 것은 필자 안목의 한계일 터. 애쓰지 않아도 바로 보이는 영화가 있으니 한국 배우들과 함께한 ‘브로커’(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제작 영화사 집, 배급 CJENM)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 송강호의 몸에 들어 영화 장면마다 깃들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베이비박스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가 세상 안에서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지, 아이에게 부모와 가정이란 무엇이며, 부모에게 자식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감독의 생각이 상현(송강호 분)이 내뱉는 말, 눈빛과 손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온다.
30년 넘게 배우로 살아온 송강호의 말투와 음성, 눈동자와 입꼬리, 둥근 손끝에 머무는 따스함을 놓치지 않고 상현에게 투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연출이라고만 할 수 없는. 감독의 세계관을 온몸에 담지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숨소리까지 끌어와 표현하는 배우 송강호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제75회 칸국제영화제는 감독의 철학을 누수 없이, 아니 풍성하게 관객에게 전한 배우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의 트로피를 안겼다.
사실 송강호는 여러 감독, 그것도 박찬욱이나 봉준호와 같은 월드 클래스 감독들의 페르소나(분신)로 불리어 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로 처음 칸국제영화제에 발을 딛었을 때 남우주연상을 받아도 좋은 개성 넘치는 실감 연기를 펼쳤지만, 초청 부문이 경쟁이 아닌 감독 주간이어서 후보가 아니었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로 네 번째 칸에 초청됐을 때 인간의 구원과 욕망, 사랑과 죄의식에 관한 대담한 주제와 파격적 표현을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 온몸으로 표현했으나 칸의 선택은 심사위원상이었다.
공교롭게도 ‘박쥐’ 때와 같은 상현이라는 이름으로, 세탁소를 운영하며 아기를 매매하는 남자로 분해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연기하니 칸의 남우주연상 트로피가 그의 것이 됐다. 일곱 번째 초청에 배우 송강호는 수상의 행운을 안았다.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 배우가 연기상을 받은 것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 이후 15년 만이고, 남자 배우로는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이다.
어찌 보면 배우는 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데 상이 비껴가기도 하고 다가서기도 한다. 그래도 상으로 칭찬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 어떻게 가능했을까에 대해 결과를 놓고 생각해 본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본선 경쟁에 한국영화 두 편이 진출한 것도 경사인데 두 영화 모두에 각각 상을 수여했다. 우연의 얼굴을 한 필연처럼 ‘박쥐’의 감독 박찬욱과 주연배우 송강호는 13년 뒤 각기 다른 영화로 수상했다. ‘헤어질 결심’이 웅장한 작품이 덩어리로 엄습하는 영화라면, ‘브로커’는 잔잔한 흐름 속에 배우들이 끌고 가는 영화다. 두 영화에 돌아간 트로피가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인 것은 필연이다.
특히나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상현은 영화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화면 위에 현신한 듯, 아기 우성이를 능숙한 손길로 건사하고 또 다른 거간꾼(브로커) 동수(강동원 분)와 아기엄마 소영(이지은 분)을 보듬는 모습으로 ‘어른’의 정의를 보여준다.
관객의 눈과 마음을 대변하는 형사 수진(배두나 분)과 이 형사(이주영 분)도 상현에게서 얽힌 상황의 해법을 본다. 칸 현지에서 ‘브로커’를 두고 범죄를 미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 영화가 결코 범죄를 미화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은 상현의 마지막 선택에서 드러난다.
영화 ‘브로커’를 보노라면 어쩐지 화면 안에 들어와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보일지 모르겠다. 바로 배우 송강호다. 21세기 가족의 정의,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수의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탐구해 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 송강호를 선장으로 내세운 브로커호를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그렇게 가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