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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39>] 맹세풀이


입력 2022.09.14 14:09 수정 2022.09.16 13:52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9화 맹세풀이


아니나 다를까 김석규의 입원 파동에도 한종탁은 술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술을 조심하는 척만 했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노지연의 눈치를 보는 일이 추가됐을 뿐이지 술을 끊으려는 계기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깐 방심한 사이 이번에 내리 이틀을 마시고 백일기도를 하게 된 것이었다.


“소나기는 피하고 보라는 말처럼 우선 집사람 무마시키려고 술 끊겠다 하는 거지, 그게 오래가는가?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열흘쯤 지났을 때 만년대리인 최가 말했다. 최 대리도 올봄에 밤새도록 마셔 대취한 적이 있었는데 아내는 이혼을 불사하겠다하고 자식들의 눈초리 역시 예사롭지 않더란다. 불현듯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짐을 느낀 최 대리는 정말 술을 끊어보겠다고 교회에 나가서 회개까지 했더란다. 그러나 그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않더란다. 핑계인지 사실인지 몰라도 사회 생활하는 동안에는 술 먹지 않고 버티는 방법이 없더란다.


상당히 의외였다. 한종탁은 준수한 외모에 중후한 멋을 풍기는 중년의 최 대리가 어떻게 자신과 똑같은 입장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했다. 불현듯 조선의 선비 무명씨가 지었다는 고시조가 떠올랐다. 가끔씩 들르는, 남원추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보았던 시조였다. 어쩌면 최 대리는 조선 무명씨의 현신인지도 몰랐다.


술 먹지 마자하고 중한 맹세 하였더니 / 잔 잡고 굽어보니 맹세 둥둥 술에 떴다 /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맹세풀이 하리라.


당시 한종탁은 술을 끊었다가 노지연의 눈치를 살펴가며 집에서만 마신다고 음주허가를 받아내서는 허가구역을 벗어나 바깥에서도 조금씩 마시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런 고시조를 대했으니 마치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한종탁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술이라는 게 자기 혼자만의 고민이나 문젯거리가 아니라는 걸 시공을 초월하여 확인한 셈이었으니까.


옛날 어떤 선비가 단주하기로 중한 맹세를 했는데 말이야. 얼마나 중했느냐 하면 술잔에까지 그 맹세가 뜨는 거라. 그래서 선비는 맹세를 돋우기 위해 잔 가득 부어서 그걸 꿀꺽 삼켜버렸대. 정말 기가 막히지 않냐? 이 정도 되면 집사람도 웃고 넘어가겠지? 한종탁의 말에 이철백이 박장대소로 오버해 주었다. 그날 한종탁은 이철백과 기분 좋게 통음했고 이튿날부터 기약 없는 금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백일기도 후 11일째 되던 날 한종탁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아니 위기라기보다는 또 다른 기회였다. 금주를 깰 수 있는, 음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오후 다섯 시경이었는데 거의 십년이나 소식 없던 대학 동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사업하는 녀석들 예닐곱 명이 경영대학원에 연수를 와서는 다리목 장어집에 모여 있다고 말했다.


“최 대리님. 아무래도 먼저 나가봐야할 거 같은데요.”


너무 반가운 마음에 퇴근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어 한종탁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최 대리는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한종탁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봐. 가서 동기들이랑 한잔 술로 회포 좀 풀라구.”


한종탁은 염 부장 눈을 피해 살며시 회사를 빠져나갔다. 십년 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나는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변명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변명을 앞세워서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만 술을 마시고 내일부터 또다시 금주를 이어가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건 한종탁의 오산이었다. 술 마시는 사람은 소갈머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한종탁은 일차를 지나고 이차를 거쳐서 삼차가 될 때까지 동기들은 뒷전이고 오히려 술과 적극적으로 함께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삼차는 술자리가 아니라 모텔방의 훌라 자리였다. 훌라를 할 줄 모르는 한종탁은 언짢은 기색을 애써 감추고 모텔을 나서 치킨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사들고 귀가했다. 노지연은 이미 잠들었는지 문을 여닫는 소리에도 기척이 없었다. 한종탁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기어코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은 전날의 취기가 점심때까지 풀리지 않으면서 해장술이나 다름없는 반주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엔 염 부장의 주선으로 거래업체와의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한종탁은 반드시 일차에서 끝내리라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이틀 연속 노지연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어떡하든 적게 마시고 일차에서 끝내야 한다. 내일의 즐거운 음주를 위하여 오늘 하루는 조금 참는다. 가늘고 길게 마시자. 굵고 짧게 마시는 우를 범하진 말자. 노지연은 한종탁의 도둑고양이 같은 조심스러운 음주행각이 가상해서였는지 그날 밤 특별히 제동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가늘고 길게’ 전술 역시 3일 만에 폐기되고 말았다. 금요일 저녁, 주말과 주일을 쉰다는 해이함이 빚어낸 참사라고나 할까. 한종탁은 안도현의 시 ‘퇴근길’을 떠올리며 최 대리와 함께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하기로 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 이것마저 없었더라면 / 아, / 이것마저 없었더라면.


안도현의 절규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지이지만 어쨌든 무명씨의 고시조에 버금가는 권주가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은 한종탁은 딱 일차만 하고 헤어지려 했는데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래방을 가게 되었고 결국 라이브 카페를 거쳐 나이트클럽까지 섭렵하느라 거의 밤을 새워버렸다. 그리하여 새벽에 귀가한 한종탁은 방바닥을 등진 채 하루 종일 뻗어있었다.


한종탁이 토요일 하루를 오로지 회복하는데 쓰고 났더니 일요일은 좀 살만해지는 것이었다. 노지연은 뒤돌아 누워 아무 말도 없었다. 한종탁이 노지연의 등 뒤에 다가가 맹수를 건드리듯 손가락으로 슬쩍 터치해보았다. 노지연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종탁은 술을 끊겠다는 다짐을 또다시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았다. 노지연이 기가 막히는지 기력이 쇠한 목소리로 술을 끊든지 말든지 그딴 건 꼴리는 대로 하라고 대꾸했다. 한종탁은 반드시 술을 끊는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우선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러자 노지연이 고개를 휙 돌리며 싸질렀다. 혼자 많이 처먹으세요!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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