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계, 특히 희곡의 경우 남성 주인공 위주의 작품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 배우들이 큰 역할을 맡는 경우가 드물었다. 지난해 본격적인 ‘여성 서사’ 작품들이 나오면서 주목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공연계에선 ‘젠더프리’에 ‘캐릭터프리’까지 나오면서 배우들에겐 새로운 ‘기회’를, 관객들에겐 새로운 ‘선택’을 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극중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에게, 여성 캐릭터를 남성 배우에게 맡기는 ‘젠더프리’ 캐스팅은 수년 전부터 공연예계서 시도되어 왔다. 첫 젠더프리 캐스팅 작품은 2015년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다. 당시 헤롯왕 역으로 배우 김영주를 캐스팅했다. 이후 이 연출은 ‘광화문연가’의 월하 역에도 정성화와 차지연을 동시에 캐스팅했다. 이후로도 ‘파우스트’ ‘햄릿’ ‘아마데우스’ ‘몬테크리스토’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등의 공연도 배역 설정에 남녀 구분을 없앴다.
최근에도 젠더프리 작품이 연달아 관객을 만나고 있다. 지난해 11월 개막한 연극 ‘오펀스’는 중심인물인 남성 건달 해롤드 역을 맡은 배우 4명 중 2명이 여자 배우(추상미·양소민)다. 형제인 트릿·필립 역을 맡은 배우 8명 중 여자 배우가 절반인 4명이다. 지난달 12일 개막한 연극 ‘아마데우스’ 역시 2019년에 이어 이번 시즌에서도 차지연이 살리에리 역으로 나선다.
젠더프리에 비해 한 배우가 고정 배역 없이 여러 캐릭터를 돌아가면서 연기하는 ‘캐릭터프리’ 캐스팅은 국내 공연계에선 흔하지 않은 시도다. 헤르만 헤세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데미안’(지난달 15일 개막)은 한 배우가 회차에 따라 연극의 두 주인공인 싱클레이와 데미안을 번갈아 연기한다.
뮤지컬 ‘해적’(3월 7일 개막)은 젠더프리와 캐릭터프리, 두 가지를 동시에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배우 한 명이 각각 남자 캐릭터와 여자 캐릭터를 모두 소화한다. 예컨대 해적 선장 잭을 연기한 배우가 다음날 공연에선 검투사 매리 역할을 하거나, 한 공연 안에서 한 명의 배우가 모험을 떠나는 소년 루이스와 총잡이 앤 역을 동시에 소화하는 식이다.
젠더프리, 캐릭터프리 캐스팅이 배우들에게 다양한 연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뿐만 아니라 관객들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공연을 볼 수 있는 ‘선택권’을 갖는다는 점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남성 주인공 서사가 지배적인 공연계의 다양성 확보도 가능하다.
하지만 긍정적인 요소들이 넘쳐남에도 프리 캐스팅이 공연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못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젠더프리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배우 차지연은 “프리캐스팅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며 “기존의 남성이었던 캐릭터를 여배우가 연기를 하면 관객들이 거부감,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작품 전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요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