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로 양대 국유 조선사 중국선박·중국중공 전격 합병
두 회사 합병 통해 총자산 75조원 규모 ‘조선 골리앗’ 태어나
슈퍼사이클 편승해 中조선 경쟁력 한단계 끌어올리려는 포석
고가수주 위주인 우리 기업의 경우 단기간엔 별 타격 없을 듯
중국에 ‘조선(造船) 골리앗’이 등장한다. 중국 정부 주도로 양대 국유 조선사인 중국선박공업(中國船舶工業·CSSC)과 중국선박중공(重工)그룹(CSIC)이 전격 합병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메가 조선회사'가 태어나는 것이다. 글로벌 조선산업이 새로운 '슈퍼 사이클‘(초호황기)에 진입한 흐름에 편승해 대형 조선업체의 합병을 통해 중국 조선업계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최대 조선업체인 중국선박그룹은 중국선박공업과 중국선박중공이 지난 2일 밤 주식 교환을 통해 중국선박이 중국중공을 흡수·합병하는 내용의 계획안에 합의하고 상하이(上海) 증권거래소에 이를 제출했다고 관영 신화통신(新華通訊) 등이 3일 보도했다. 2019년 합병을 선언한 이후 느슨한 형태로 묶여 있던 두 회사가 5년 만에 합병을 최종 결정했다.
중국선박과 중국중공은 이날부터 상하이 증권거래소에서 각각 주식거래가 잠정 중단됐다. 거래중단 직전인 2일까지 두 회사의 시가총액은 각각 1561억 위안(약 29조 2800억원)과 1136억 위안이다. 두 회사는 각각 공시를 통해 이번 합병이 국가의 중대 전략과 장비산업 발전, 군사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고부가가치 건조 기술력을 높이고 업무 중복을 막아 상장사의 경영능력을 높이는데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경제매체 21세기경제보도(經濟報道)에 따르면 중국선박은 장난(江南)조선·상하이와이가오차오(上海外高橋)조선·중촨청시(中船澄西)선박·광촨(光船)국제 등 4개의 조선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18%가 증가한 360억 1700만 위안에 달한다. 순이익은 11억 9800만 위안으로 적자 전환됐다고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財新)은 전했다. 중국선박은 현재 중국 시장에서 16%, 세계 시장에서 11%의 점유율을 각각 기록 중이다.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 각종 함정을 설계·생산하는 중국중공은 다롄(大連)조선·우창(武昌)조선·베이하이(北海)조선 등의 산하 기업이 있다.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221억 200만 위안이고 순이익은 4억 4400만 위안을 기록했다. 중국중공은 중국 두 번째 항공모함인 산둥(山東)함을 중국 최초로 독자 건조했다.
이번 합병으로 총자산이 4000억 위안에 달하는 만큼 자산은 물론 매출·선박 수주량 등 방면에서 '세계 1위 조선사' 왕좌를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차이신은 내다봤다. 한국 최대 개별 조선사인 HD현대중공업의 상반기 매출액은 7조원 정도이고, 자산총액은 16조 3000억원 규모이다. 계열사를 망라한 HD현대그룹 전체 자산총액이 68조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합병 법인의 덩치를 대략 가늠할수 있다.
이로써 새로 출범하는 ‘조선 골리앗’은 수주 잔량을 기준으로 세계 조선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연간 영업이익은 1000억 위원에 달한다.
중국 정부는 1982년 5월 조선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제6기계공업부 소속 135개 기업을 한데 모아 중국선박공업총공사를 설립했다. 이후 10여년이 지난 1999년 7월 1일 국제 경쟁력과 효율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창장(長江·양쯔강)을 경계로 ‘남선’(南船)으로 불리는 중국선박공업과 ‘북선’(北船)인 중국선박중공으로 분가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수주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중국 조선산업은 말그대로 외화내빈(外華內貧)에 시달려온 ‘빛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었다. 수주총액 면에서는 한국 조선업체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1위를 다투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중소 조선사들의 심각한 수익 악화, 이를 떠안은 중국선박의 부실 확대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2019년 단행됐던 중국선박공업의 중국선박중공 인수, 즉 ‘남북선’(南北船) 한몸이 된 중국선박그룹이 거듭 태어난 것이다.
사실 두 회사의 합병은 앞서 2019년 중국선박과 중국중공의 합병으로 세계 최대 조선그룹인 중국선박그룹이 탄생하면서 예고됐다. 이번에 합병하는 중국선박과 중국중공은 2019년 중국선박그룹 출범 당시 두 회사 간 업무 중복 경쟁을 막기 위해 2026년 이전까지 양사를 합병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는데, 이를 2년 앞당긴 것이다.
특히 양사의 합병은 글로벌 조선업계가 슈퍼사이클에 진입하면서 중국 정부가 자국 조선사의 덩치와 체질을 키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한층 더 높이기 위해 양사 간 합병을 적극 추진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업인 클락슨 리서치에 따르면 7월 신조선가지수는 187.98다. 1년 전보다 15.61포인트 올랐다. 조선업 최대 호황기로 꼽히는 2008년 9월(191.6) 수준에 육박한다. 중국 선완훙위안(申萬宏源) 증권은 이번 조선업계 슈퍼사이클이 10여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기준 중국 선박 건조량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8.4% 늘어난 2502만 DWT(재화중량톤수)에 달한다. 전 세계 선박 건조량의 55%를 차지했다. 선박 신규 수주량은 43.9%나 증가한 5422만 DWT에 이른다. 전 세계 신규 수주량의 무려 74.7%를 쓸어갔다. 같은 기간 수주잔량도 38.6% 증가한 1억 7155만 DWT다. 전 세계 수주잔량의 58.9%에 달한다.
중국 관세청 격인 해관총서는 중국의 1~7월 선박 수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3%나 늘어난 3470척에 이르고 금액으로는 84.4%나 늘어난 1736억 7900 위안이라고 밝혔다. 이는 그만큼 중국의 고부가가치 선박 수출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 컨테이너선 수출량은 112.4%나 늘어난 189척이고, 금액은 140.8%가 증가한 754억 6600만 위안에 달한다.
이번 합병은 2019년 두 회사가 합병안을 발표한 것에서 출발했다. 중국 국무원 산하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는 국유기업 개혁 차원에서 두 기업을 합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독립 경영체제가 바뀌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 등 남방을 중심으로 한 사업부는 상업용 선박 제조를, 북부를 담당한 사업부는 군함 등 방위산업 쪽에 주력하면서 통합 속도가 더뎠다.
이 때문에 5년 만에 완전 통합하기로 한 것은 독립 경영으로 인한 비효율이 두드러졌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중국선박 산하 4개 조선사, 중국중공 산하 3개 조선사 간 수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익성이 곤두박질친 것이다.
중국선박은 조선업황 활황에도 지난 상반기 순적자를 냈다. 차이신에 따르면 중국선박은 “합병으로 경영진을 간소화하고, 동종업계 경쟁을 줄여 경영 능력을 개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한 조선 전문가는 “현지 조선사끼리 보조금 수령 및 수주 경쟁이 과열한 데 대한 불만이 커지자 정부가 손을 댄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선박은 이번 합병을 계기로 그동안 점유율이 낮았던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을 적극 공략할 계획이다.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선박에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암모니아 운반선 등이 있는데 이 선박들은 한국이 사실상 수주를 싹쓸이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번 자산 개편을 통해 국가 주요 전략과 강군 건설이라는 주력 사업에 더 집중하고, 선박건조 사업의 질적 발전을 가속화하며, 업계 경쟁을 표준화하고 상장기업 운영 품질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합병 후 중국선박이 ‘고급·정밀·최첨단' 고부가가치 선박 제품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해 경쟁력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라고 관영 상하이증권보(上海證券報)는 내다봤다.
우리 조선업계도 합병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고가 선박을 위주로 선별 수주 전략을 펼치고 있는 만큼 당장 시장 상황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대체적인 견해다. 하지만 합병으로 외형을 키운 중국선박이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고 수주 경쟁력을 강화할 경우 한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