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바꾸는 것은 산과 강만이 아니다. 마음의 풍경 또한 세월의 바람에 따라 색을 달리한다. 사십 년의 시간 속에서 봄은 수없이 피고 졌지만,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아내의 미소 속에 깃든 한결같음과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사랑의 자취일 것이다.
ⓒ결혼 40주년을 맞이한 부부
입춘을 지났건만 며칠째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차라리 눈이라면 좋으련만, 결혼 40주년 기념하는 여행을 떠나기에는 다소 어둑한 날씨다. 아내는 일기예보를 보며 “며칠만 늦추면 맑다는데, 당신이 서둘러서 그렇잖아요”라며 투정을 부린다. 사랑과 열정, 행운을 상징하는 루비 결혼기념일임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싶어 서운한 모양이다. 사실 그동안 결혼기념일마다 선물을 챙기고 꽃다발을 준비하며 여행을 계획하는 일은 늘 나의 몫이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는데 왜 남편인 나만 일방적으로 선물을 챙겨야 하느냐는 억울함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십 년이라는 숫자가 크게 다가와 다른 해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언뜻 스치면서 움찔해진다.
눈이 소복이 내린 소나무 숲
맞벌이하면서도 애들이 아파 발을 동동 구를 때도 ‘아내가 알아서 챙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출근했다. 직장에 아쉬운 소리 하면서 애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조치를 끝낸 후 거북목을 한 채 눈치를 보며 사무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인생에서 절반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식탁을 차리고 아이를 키우고 집안의 무게를 묵묵히 떠안아 온 아내가 아닌가. 그동안 당연함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헌신을 얼마나 가볍게 여겨왔던가.
ⓒ소나무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눈이 쌓인 풍경
비에 젖은 도로를 따라 강원도 펜션으로 향했다. 와이퍼가 앞 유리를 쓸며 규칙적으로 내는 소리가 묘하게 귀를 자극한다. 이 녀석도 오래 사용했으니 챙겨 달라고 투정 부리는 것 같다. 느긋하게 달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인제양양터널을 빠져나오자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흩날리던 빗방울이 하얀 눈송이로 바뀌고 나무는 눈꽃을 피운 듯 가지마다 무게를 이기고 서 있다. 제설차가 고속도로 두 개 차선을 가로막고 달리며 양쪽으로 눈을 밀어낸다. 그 뒤를 엉금엉금 따라가는 차량의 행렬은 마치 알에서 깨어나 바다를 향해 기어가는 거북이 무리 같다. 인생의 길도 이와 다르랴. 거센 풍설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길을 열어왔다.
눈길을 뚫고 찾아간 시골 막국숫집
눈길을 뚫고 찾아가는 시골 막국숫집은 겨우 자동차 바퀴 자국을 따라갈 정도만 뚫려있다. ‘이런 외진 곳에 좋지 않은 날씨에 손님이 올까’ 하는 걱정을 하며 찾아갔는데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허름한 간판 아래 피어오르는 김이 추위를 잊게 한다. 한 젓가락 입에 넣자, 담백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문득 깨닫는다. 인생의 참맛이란 결국 ‘함께 있는 맛’이라는 것을. 젓가락을 들고 웃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어떤 향기보다 따뜻하게 느껴진다.
ⓒ전깃줄에 눈이 소복이 쌓인 모습
다음 날 새벽, 창문 밖이 유난히 고요해 커튼을 걷자 온통 하얗다. 밤사이 세상은 소리까지 묻어 둔 채 조용히 덮여 있다. 전봇대의 가느다란 줄에도 몇 센티는 될 것 같은 눈이 소복이 앉아 곡예를 한다. 바깥으로 나갔다. 눈 치우는 장비를 단 경운기가 길만 빠끔히 내놓았다. 할머니가 손자를 눈썰매에 태워 끌고 엄마는 사진 찍느라고 바쁘다. 손자가 썰매에서 떨어져 눈 위에 나뒹군 줄도 모르고 할머니는 달린다. 딸은 박장대소다. 한 세대의 사랑이 또 한 세대로 이어지는 풍경이다. 문득 40도를 오르내리는 라오스에서 에어컨 아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손주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함께 왔더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바닷가 카페에서 바라본 모습
눈보라가 거세져 관광을 접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통유리 너머로 설악의 능선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빨간색과 하얀 등대가 마주 보고 서 있다. 세월 속에서 서로를 비추며 걸어온 우리 부부처럼. 흰 눈이 푹신하게 덮인 모래사장에는 중년의 여인들이 사진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거센 파도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서핑보드를 타고 물결을 가른다. 높은 파랑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벌어진 파도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하의 날씨에 춥지도 않은지 청춘은 역시 패기 넘치고 거침이 없어 부럽다. 파도에 휩쓸리고도 다시 일어서는 그들의 모습이 인생의 풍랑을 해치며 여기까지 함께 걸어온 우리를 닮았다.
ⓒ해변 카페에서 바라본 두 등대가 나란 서 있는 바닷가 풍경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아내를 바라본다. 신혼 초 커다란 배낭을 메고 백담사 계곡을 거처 중청, 대청봉을 거쳐 속초해변으로 내려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윗옷을 훌러덩 벗고 들락날락하다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끙끙 앓았다. 남녀가 각방을 써야 함에도 남편 간호해야 한다며 고집 피워 보살펴 주던 여인과 지금 여기에 마주 앉아 있다. 봉봉포도 주스를 먹여주며 “내일은 꼭 정상까지 가자”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그로부터 사십 년이 흘렸다.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그녀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다.
ⓒ눈 쌓인 소나무 숲을 걸어가는 부부
돌이켜 보면 사십 년의 세월은 루비보다 단단한 결정체였다. 청춘의 열정보다 깊은 것은 연륜이었고, 설렘보다 귀한 것은 인내였다. 루비 여행에서 젊은 날의 전율 대신 서로를 감싸 안는 따스한 온기를 확인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빚어온 사랑의 색깔이 아닐까. 사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바람을 맞고도 뿌리를 더 깊이 내렸다. 이제 우리의 사랑은 루비처럼 빛나되 단단하고, 연리지처럼 각자의 결을 지닌 채 하나의 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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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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