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간의 랑부예 G-6 정상회의
G-7 정상회의가 독불 셔틀외교에 빚진 것
지도자가 우물 안 개구리라면 국가의 운명은?
ⓒ 데일리안DB
지난해 6월 캐나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는 현대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띤 정상회의였다. G-7 50주년을 기념하는 정상회의였기 때문이다. G-7,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 7개국 정상들이 모여 국제적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도 끼고 싶어하지만 끼지 못하는, 국제외교의 정점, 말하자면 국제외교의 상원격이다. G-7 정상회의는 처음부터 G-7 정상회의가 아니었다. 원래는 G-4 재무장관회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만 이었다.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로 국제 통화 체제가 혼란해지고, 1차 석유파동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조지 슐츠 재무장관은 4개국 재무장관에게 백악관 1층 도서관에 편하게 모이자고 제안했다. ‘도서관 소파에 편히 앉아 커피 마시며, 배석자·통역자 없고 의사록 없는 영어 회의’, 그게 컨셉이었다. ‘도서관 그룹(Library Group)’은 후에 일본이 추가돼 G-5 재무장관의 비공식회의로 운영됐다. 이를 정상회의로 격상시킨 것은 의외로 독일과 프랑스였다.
2박 3일간의 랑부예 G-6 정상회의
1975년, 독일의 슈미트 총리가 제안하고,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회의 규칙을 확정하고 장소도 제공했다. 회의 규칙은 ‘도서관 그룹’ 규칙과 거의 같았다. 넥타이 풀고 수행원 빼고, 의제는 무제한, 절대 비공개였다. 달라진 것은, ‘고성의 장작 난로가’라는 훨씬 더 편안한 분위기였고, 재무장관이 아니라 ‘국가 정상’인만큼 훨씬 의제가 자유롭고, ‘2박 3일’인만큼 훨씬 더 깊이 있고 폭넓은 대화가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일본 정상이 참석하면서 통역이 필요하게 됐고, 막판에 이탈리아가 초청받아 참여하면서 G-6 체제가 되었다.
백악관 도서관은 먹고 자기에 불편하고 가족 동반도 어려웠지만, 과거 프랑스 왕실의 별궁이었고 지금은 프랑스 대통령의 별장인 랑부예성은 모든 게 가능했다. 작은 베르샤유, 또는 편안하고 자연친화적인 베르사유로 칭해지는 랑부예성에서의 2박 3일에 모든 정상이 대만족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이렇게 솔직하고 실질적인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라고 극찬했고, 1회성 G-6 정상회의가 연례회의로 격상됐다. 이듬해인 1976년 회의에 캐나다가 정식 합류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G-7이 완성되었다. 그런 의미를 담아 50주년 되는 해 G-7을 캐나다가 주최한 것이다.
G-7 정상회의가 독불 셔틀외교에 빚진 것
G-7 정상회의의 많은 것이 프랑스와 독일 정상의 셔틀외교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일과 프랑스는 프랑크 제국이 베르됭 조약(843)과 메르센 조약(870)으로 나뉜 형제 나라다. 두 나라는 20세기 전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1차 세계대전(1914~1918),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치르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도버 해협 건너 영국은 두 나라를 이간질하고 갈등을 부추켜 이익을 챙기곤 했다. 그런 두 나라가 유럽연합 EU를 공동 설립하고 유럽평화의 구심점이 된 데는 두 나라 정상의 셔틀 외교가 결정적이었다.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는 원래 재무장관 모임인 ‘도서관그룹’의 멤버로 자주 마주치던 사이였고, 서로의 경제정책관에 의기투합하던 차였다. 공교롭게도 1974년 5월 비슷한 시기 대통령과 총리에 취임해 ‘국가정상 동기’가 되었다. 데스탱 대통령은 복잡한 의전을 걷어내고 동기끼리(?) 편하게 만나자고 제안했고, 실용적이고 소박한 성격의 슈미트 총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두 정상은 파리와 본(통일 이전의 독일 임시 수도는 본이었다)을 오가며 편하게 대화하고 협의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재임 7년간의 재임 기간 약 100회, 평균 6주에 한번 만났다고 한다. ‘셔틀 외교’란 말은 키신저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의 미중 대화 때 나왔지만, 정상의 셔틀 외교는 이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집무실 상호 방문으로 시작했지만, 관저로, 사저로, 별장으로 만나는 장소가 점점 더 사적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재미있는 점은 사회적 배경의 차이였다. 슈미트 총리는 지스카르 프랑스 대통령 별장인 랑부예 성을 방문했지만, 자신의 함부르크 자택에 지스카르 대통령을 초대했다. 데스탱 대통령은 독일 중산층의 소박하고 실용적인 생활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독일의 실용적 경제정책을 이해했다. 반면 슈미트 총리는 랑부예 성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적응해 나갔다. 차이는 컸지만 두 정상은 때로는 가족까지 함께 주말을 보냈다. 정치 경제뿐 아니라 음악, 예술, 철학 등을 이야기하고 자녀 걱정을 같이 했다. 피아노를 같이 치고 사냥을 같이 하며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앙숙에서 ‘르 뒤오(Le Duo)’로
1976년 남부 프랑스 지중해변 브레강송 요새(Fort de Brégançon)에서 두 정상이 수영복 차림으로 현안을 논의하는 사진이 공개되자 두 나라 국민은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다른 어떤 화해의 메시지보다 더 강력한 앙숙 국가의 화해였다. 유럽에 진정한 평화가 온 것이다. 2차 대전 초기인 1941년 12월, 백악관을 방문한 처칠 영국 총리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앞에 벌거벗고 서서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습니다”고 말했던 일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슈미트 총리는 할아버지가 유태계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데스탱 대통령에게 토로했고, 데스탱 대통령은 슈미트가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비밀을 지켰다.
국제 사회는 두 사람을 ‘르 뒤오(Le Duo)’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들은 주말 대화를 통해 20세기 말 국제 질서의 뼈대를 만들었다. 1975년 G-7 정상회의를 창설하고 유로화의 전신인 유럽 통화제도를 설계했다. 1990년 독일 통일이 성사된 것도,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유럽공동체(EC)를 거쳐 1993년 유럽연합(EU)로까지 발전한 것도, 2002년 유로화가 발행된 것도 두 사람이 닦은 두 나라간의 신뢰가 밑바탕이 되었다.
지도자가 우물 안 개구리라면 국가의 운명은?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간에도 이런 정상 셔틀 외교가 필요하다. 우선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언어를 익히고 외국 문화와 정서를 익히고 외국인에 익숙해져야 한다. 정치권과 공직 분야에서는 그렇게 준비된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지도자 군을 배출해야 한다. 국민은 준비된 또는 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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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구철 금강대 연구교수·전 TV조선 선거방송기획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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