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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 출신 '꼼꼼원순' 득될까 독될까


입력 2014.05.26 09:38 수정 2014.05.26 11:58        남궁민관 기자

<측근들에 듣는다 우리 후보는요②-박원순 새정연 서울시장 후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걱정"…디테일 뛰어나지만 큰 그림 놓쳐

22일 6.4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전국에서 일제히 시작된 가운데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가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인사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일을 안했다? 일을 너무 많이해서 걱정이다.(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1년 365일 24시간 술도 담배도 하지않고 하루 4시간 밖에 안자면서 정말 치열하게 일하는 스타일이다.(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6·4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재도전하는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 대한 측근들의 평은 그야말로 '꼼꼼함과 성실함'으로 요약된다. 그들의 평을 들어보면 박 후보의 별명이 왜 '꼼꼼원순'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다.

박 후보가 서울시장 후보로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나서면서 최근 가장 가까운 곳에 그를 접하고 있는 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박 후보의 성실함에 혀를 내두른다. 진 의원이 "박 후보가 너무 잠이 없으셔서 캠프 관계자들이 고생이 많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다.

특히 최근 박 후보가 일을 안한다라는 일부 지적들에 대해 고개를 내저으며 "박 후보는 과시에 대한 욕심이 없는 분이라 전시성 사업을 하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는 일을 안하는 것처럼 보일뿐"이라며 "실제로는 작지만 시민들의 실제 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을 끝없이 해결 해왔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시절 박 후보와 함께 했던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역시 그의 성실함을 최고의 장점으로 꼽는다.

안 처장은 "끊임없는 열정으로 공익을 늘리기 위해 몇십년을 바쳐온 분"이라며 "아직도 그가 가진 장점이나 치열함이 시민들에게 덜 알려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평소 박 후보가 서울 시장을 맡았을 당시 그가 업무를 보는 책상에는 엄청난 양의 서류가 쌓여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만큼 꼼꼼히 서류를 살펴보고 일일히 실무진에 지시를 하는 '꼼꼼 국정'으로도 유명하다.

박 후보 역시 "내 브랜드는 꼼꼼하고 균형있는 행정"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진 의원은 박 후보의 성실함과 꼼꼼함의 일례로 지난 2012년 발표한 보도블록 10계명을 소개하기도 했다. 진 의원은 "다른 시장들 같으면 연말에 보도블록 갈아엎지말아라는 지시 정도만 내릴 것"이라며 "하지만 박 후보는 보도블록 교체를 위해 지켜야할 10가지를 일일히 정할 정도로 꼼꼼함을 드러낸 대표적 예"라고 설명했다.

안 처장 역시 지난 희망제작소 시절 박 후보의 성실함에 대한 일화로 꺼내놓았다.

안 처장은 "박 후보가 희망제작소에 있을 당시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고문의 역사를 총정리한 1000페이지가 넘는 '야만시대의 기록'이라는 책을 3권이나 냈다"며 "시민운동가들도 언제가 해야지 해야지 했던 일을 성실함으로 이뤄낸 대단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박 후보가 10만원이 넘는 이 책을 200권을 사서 일일히 편지를 써 시민단체, 인권단체에 돌리적이 있었는데 당시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는 큰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꼼꼼함은 곧 일에 있어서의 집요함과 근성으로도 이어졌다. 박 후보가 참여연대에서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을 하던 시절 상대 대기업 관계자가 시민단체가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할 줄 몰랐다고 호소를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꼼꼼함과 근성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도 있다. 사안에 따라서 빠르게 처리돼야할 업무들도 워낙 꼼꼼하게 살피다 보니 계속 검토 과정에서 늦어지는 경우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박 후보가 지난 2년 7개월간의 서울 시정에 대해 "침체됐다"는 지적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이 같은 지적을 의식한듯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속도 보다는 방향"을 강조하고 나서기도 했다.

또 디테일을 강조한 시정을 펼치다 보니 큰 그림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한 시민운동가는 "박 후보는 디테일한 것에 강하고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소통도 잘하시는 편"이라며 "다만 이런 디테일에 집중하다보니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큰 차원의 비전이 상대적으로 아직은 미약한 것 같다"고 단점을 꼽았다.

'천하'를 먼저 생각하는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

박 후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시민운동가 시절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고 2000년 아름다운 재단에 이어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했다. 또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운영하며 대한민국의 시민 운동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박 후보의 활동은 국내 시민 운동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참여연대 활동 시절 그는 기존 진보 진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권, 재벌, 공공기관 등의 개혁을 주도했다. 저항이 아닌 합법적 방식이었다.

그는 이 시절 소액주주운동을 비롯해 사법개혁운동, 국회의원 낙선 운동 등 주요 활동들을 펼쳤다.

1998년 미국을 방문한 박 후보는 기부와 나눔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리고 만든 아름다운 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는 기부와 나눔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방식의 시민 운동을 전개한다.

이어 2006년 설립한 희망제작소는 지역 소상공인이나 취약 계층의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박 후보가 희망제작소를 운영하면서 고민해 온 '시민 참여형 발전'은 결국 그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같은 박 후보의 시민운동 시절에 대해 안 처장은 "박 후보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던 분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인권과 역사에 집중했던 사람"이라며 "자신의 전재산을 기부하고 정작 본인은 10억원에 가까운 빚을 질 정도로 사심없이 삶을 바쳐온 분"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이같은 시민운동가의 경험은 박 후보가 서울시장직을 맡았을 당시에도 고스란히 시정에 반영되기도 했다.

진 의원은 "시민 운동가라고 하는 것은 데모꾼이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시민의 눈으로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비판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며 "박 후보는 끊임없이 시민들과 소통하며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시정에 적용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로 타요버스를 꼽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혁신을 이끈 시민운동가로서의 박 후보에게도 그림자는 존재한다. 아름다운 재단 운영 당시 '톱다운(상의하달식)' 방식의 수직적 운영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아름다운 재단 역시 다른 시민단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업가형' 방식의 운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또 삼성그룹이나 론스타 등으로부터 후원금을 받거나 박 후보가 사외이사로 근무하던 시절 포스코와 풀무원 등 대기업에게 기부금을 받으면서 비판의 구실을 스스로 잃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책 좋아하던 시골 아이… 옥살이·인권변호사 인생 전환점

박 후보는 성장과정에서 몇 번의 위기를 맞으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됐다. 그는 몇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이어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는 기회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박 후보는 지난 1956년 경남 창녕의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2남5녀 가운데 차남(여섯째)으로 태어나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녔다.

책을 좋아하던 박 후보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친형을 따라 상경, 재수 끝에 서울 경기고에 입학한다. 당시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 3개월 동안 양말을 갈아신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이미 타고난 고집과 근성을 갖고 있었다.

이후 또 다시 재수 끝에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박 후보는 입학 3개월만에 첫번째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우연히 참가하게 된 유신체제 반대시위에서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 뒤 제적되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출소 이후 복교 되지 않은 박 후보는 바로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 독학으로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된다. 하지만 박 후보는 애써 얻은 검사의 자리를 6개월 만에 자기 손으로 관두게 된다. 사형집행 참관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검사를 그만둔 박 후보는 또 한번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를 만나면서다. 그는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조 변호사와 함께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게 된다.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구로동맹 파업사건', '보도지침사건', '한국민중사사건',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주요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아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1988년에는 조 변호사 등 진보적 성향의 법조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남궁민관 기자 (kunggija@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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