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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개혁의 중심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입력 2014.07.04 14:42 수정 2014.07.06 15:06        여행데스크

[Wanna Be There]화려함 이면에 스며든 나눔의 미덕

ⓒ Get About 트래블웹진

1517년 10월 31일, 대학교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95개 조문’을 통해 당시 부패했던 로마교황청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교리를 주장했다.

루터의 복음은 당시 교황에 억눌러 있던 독일의 제후, 시민계급 그리고 인문주의학자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급속도로 세력이 확장돼 갔다. 그러자 로마교황청은 루터의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탄압했다. 루터 역시 로마카톨릭에 맞서 이곳에서 종교개혁을 전개한다.

두 종파간의 갈등이 커지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의 복음주의도 로마카톨릭처럼 하나의 종교로 동등하게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개혁운동은 바이러스처럼 주변으로 전파되어 스위스의 츠빙글리, 프랑스의 칼뱅이 종교개혁을 시도한다. 이로써 동방정교회와 로마카톨릭으로 양분되어 있던 그리스도교는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파로 한 번 더 분파됐다.


아우크스부르크로 들어가기

ⓒ Get About 트래블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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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독일의 풍경을 마주한 순간. 자욱한 안개 사이로 차분한 마을이 희미하게 보인다. 독일은 철강 산업과 전쟁 등 냉철한 이미지의 국가였는데 부드러운 새벽 풍경은 예상외의 반전이었다.

대부분 승객들이 종점인 뮌헨으로 향하기에 아우크스부르크에 하차하는 승객은 몇몇 없었다. 열차에서 내리니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아우크스부르크 중앙역 Augsburg HBF

ⓒ Get About 트래블웹진

노란 색 역과 파란 하늘과의 색감 조화가 아름답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민들을 보니 이제 하루의 서두임을 깨닫는다. 성실함과 노력이 독일 최고의 브랜드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의 고도, 아우크스부르크

ⓒ Get About 트래블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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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는 트리어(Trier)와 함께 독일 최고의 고도(古都)다. 로마제국시절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도시가 조성되어 현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유럽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은 상업 도시로 큰 번성을 누렸지만, 반면 전쟁 때마다 상흔도 피해갈 수 없었다.

좁은 골목길을 방황 중 막스밀리안거리(MaximilianStr)가 나타났을 때 마치 동화가 숨어 있다가 나타난 느낌이었다. 이 거리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척추이자 역사다.

성 울리히&아프라교회, 셰츨러 궁전, 대성당, 시청 등 살아있는 역사 거리이며, 거리 바닥의 돌들이 고대 로마시대의 것 그대로다. 광장 중심에는 헤라클레스와 머큐리분수가 주변 파스텔 톤 건물과 함께 어울려 평화로운 자태로 물을 뿜어낸다.


성 울리히&아프라(St. Ulrich und Af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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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거리 끝자락에 인류 종교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교회와 성당이 공존한다. 마틴 루터의 복음주의는 이곳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항하며 종교개혁을 전개했다.

당시 로마카톨릭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제후, 귀족, 주민들 모두 루터파를 지지했다. 카톨릭은 이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제후들도 카톨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향을 행세하고 싶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의 개신교도 정식종교로 인정받음으로써 로마카톨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길을 걷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 그리스도계는 신교와 구교라는 재질서의 시간을 갖게 된다.

성 울리히 루터교회(앞편의 작은 교회) & 아프라 성당(뒷편의 큰 성당)은 종교화합의 상징이다. 종교개혁 때 파괴되었던 성당을 카톨릭과 개신교의 화해기념으로 성당과 교회로 재건축했다. 이곳에는 그리스도교의 성인인 성 울리히와 성 아프라의 석관이 있다.


셰츨러궁전(Schazler Pal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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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절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서 막대한 재산을 축척한 대부호 푸거가문이 건립한 궁전(?)이다. 궁전 외관이 아닌 화려한 고택 외관이라서 사실 찾기가 의외로 어려웠다.

귀족이 궁전을 소유했다는 점은 당시 푸거가문이 제후보다 더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푸거가문과 벨저가문의 등장은 아우크스부르크를 금융과 상업도시로 번영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건축물은 18세기 로코코양식으로 귀족들의 공간으로 건립되었다. 현재 이곳은 근대독일회화를 전시한 주립회화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곳에 와야 할 이유는 '축제의 방'이다. 방에는 마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보는 듯 샹들리에와 금으로 치장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청사(Augsburger Rathaus)과 페를라흐 탑(Perlachtu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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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사와 페를라흐 탑은 돔지붕에 동양적인 감성이 느껴져서 마치 이슬람세계에 온 듯 이색적이었다. 왠지 친구처럼 보이는 두 건물은 2차 세계대전의 화마로 파괴된 후 다시 재건되었다.

시청사 3층에는 온통 금과 명화로 장식된 황금의 방이 있다. 이것은 아우크스부르크의 부유했던 명성의 역사적 근거다.

시청 앞 광장은 중세와 현대가 동화되어 있다. 어깨동무하며 밀착되어 있는 건축물들에서 왠지 친밀감이 느껴진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빈틈이란 없다. 그래서 골목길의 부재라는 독특한 풍광을 연출한다.


푸거라이(Fugger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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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럽 최대 갑부였던 푸거가문의 야곱 푸거(Jakob Fugger der Reiche)는 가난한 시민들을 위해 무료에 가까운 임대주택단지를 건설했다.

이곳이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 임대주택단지다. 다만 입주에는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아우크스부르크 시민 중 부채가 없는 카톨릭 신도여야 했다. 게다가 하루에 3번 푸거가문을 위한 기도는 필수며 밤 10시가 되면 모든 문을 닫을 만큼 금욕적인 생활이 조건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부 파괴되었던 것을 푸거재단이 복원했다. 현재 67개의 저택과 성당에 140가구가 혜택을 받고 있어 '도시 안의 도시'로 불린다. 연간임대료는 상징적인 의미로 500년과 똑같은 0.88다.

다만 과거와 달리 관리비가 개인부담이라고 한다. 관광객 입장료는 연간임대료보다 비싼 4€!! 하지만 저렴한 금액이며 부족한 관리비로 기부된다니까 기분 좋게 지불하고 입장하자.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황제나 귀족들의 화려했던 이야기만 조명하게 되는 것 같다. 화려했던 상업도시였던 아우크스부르크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화려함 이면에 스며든 나눔의 미덕과 서민들의 삶을 이곳에선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이곳 출신인 모차르트 가문의 흔적도 만날 수 있다./글·사진-노을지다

데일리안과 하나투어GetAbout(getabout.hanatour.com)의 제휴 글임을 밝힙니다.

하나투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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