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남근석 기행>정선 북평면 난향로원
애절한 아라리 가락의 강원도 정선은 곳곳에 수려한 자연경관과 때 뭇지 않은 인심 등으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간직한 고장이다. 고려왕조가 망한 뒤 조선개국을 반대했던 신하들 중에는 보복이 두려워 전오륜을 비롯한 7명이 정선 남면 낙동리 서운산으로 은거지를 옮기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며 여생을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았다.
이들은 당시 고려왕조에 대한 흠모와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롭고 고달픈 심정 등을 한시로 지어 읊었다. 훗날 세인들은 이를 풀이해 부른 노래가 ‘정선아리랑‘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아라리 가락은 지금도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아라리 가락을 흥얼거리며 정선읍에서 42번 국도를 타고 임계방향으로 달린다. 오른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며, 왼쪽은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이 국도와 나란히 이어졌다. 나전삼거리를 조금 벗어나자 왼쪽에 '난향로원'이라는 작은 공원이 나타난다. 예전에 없던 공원이다.
이 공원 비탈진 곳에는 여성의 음부를 빼닮은 바위 두개가 있는데, 작은 것은 손녀음석, 구멍이 뻥 뚫려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큰 구멍은 할머니 음석이다. 구경 온 나이든 사람들은 음석 앞에서 깔깔대며 웃는다. 한 아주머니는 “어머 똑 같다며” 한마디 던진다.
1970년대 초, 정선선 철도 개설될 당시 산의 흙을 파내 철길공사에 사용했는데 그때 흙속에 묻혀 있던 음석이 드러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보기가 민망스러워 이 음석을 흙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그 후부터 마을 부녀자들의 바람기가 발동하는가 하면 인근도로변에서는 교통사고도 빈번했다. 주민들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마을 주변에서 발생하자 다시 음석의 흙을 파내고 원상태로 되돌리자 마을의 액운은 사라졌다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이때부터 난향신의 노여움 때문이라 여기고 음석을 소중히 관리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정선군이 2004년 음양의 조화를 위해 공원을 조성하면서 어린나이에 죽은 난향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숙암리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남근석을 기증받아 이곳에 옮겨 놓았다. 남근은 음석과 마주보고 있는데, 신비할 정도로 남성의 성기를 빼 닮았다. 특히 남녀가 함께 이곳을 찾으면 화합이 잘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남녀성석이 있는 곳은 옛 부터 이야기 거리가 무수하다. 전설에는 고려 말 박씨성을 가진‘난향’이라는 어린색시가 이곳 어느 집안에 시집을 왔다. 어느 날 색시는 시집와 처음 냇가에 빨래를 하러 나갔는데, 때 마침 강물에 떠내려 오는 고리바구니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바구니를 건졌다. 그 속에는 무녀가 쓰는 비단옷,방울,부채 등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난향이는 신기할 정도로 알지 못할 기운이 나타났다. 그녀는 물건을 들고 온 동네에 자랑을 하고 다녔다.
이 소문을 들은 시아버지는 사대부 가문에 출가한 여자가 해괴한 행동을 한다며 심히 꾸짖었다, 그 일로 어린색시는 인근 야산에 올라가 소나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 후 원혼이 서린 귀신이 되어 시댁집안 식구들을 괴롭히고 대가 끊어지는 등 후환을 낳게 했다. 화근을 당한 시댁에서는 비단 옷 한 벌을 제물로 놓고 원혼을 달램으로서 후환을 면하게 됐다. 이때부터 이산의 이름을 난향산으로 부르게 됐으며, 또한 마을에서는 매년 단오 날, 떡과 음식을 준비해 다복과 종족번식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지금은 중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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