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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파괴하고 로마가 부활시킨 코린토스


입력 2015.01.11 20:11 수정 2015.01.11 20:21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38>시시포스가 청건하고 해양 패권으로 번영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코린토스(Korinthos)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이어주는 지협(地峽)에 위치해 있다. 특히 동남쪽으로 사로니코스만을, 북서쪽으로 코린트만을 끼고 있어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왕래가 가능한 교통의 요충지에 있다. 사로니코스만을 통해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를 건너 아시아로 뻗어갈 수 있었고, 코린트만을 통해 로마와 시칠리아로 진출하기 매우 유리했다. 양쪽에 바다를 끼고 있는 6.3킬로미터의 코린토스 지협은 여러 차례 운하 건설이 시도되었다. 이곳을 뚫기만 하면 아테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항로를 무려 320여 킬로미터나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BC 6세기에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도로스가 운하 건설을 계획했었고, 네로 황제 역시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가 암살되면서 무위로 끝났다. 코린토스 운하는 프랑스 기술자 레셉스에 의해 1882년부터 1893년까지 장장 12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험난한 바다 항해를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 지협의 양쪽에 있는 포구까지 배를 육지로 들어 올려 이동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코린토스가 육상과 해상 모두 교통의 요지가 되다보니 고대 그리스 국가 중에서 가장 상업이 번성하고, 해상 무역이 활발했다. 코린트가 점차 환락의 도시로 타락해 간 것도 지나친 번영의 후과(後果)였다.

코린토스 운하의 모습 ⓒ박경귀

물론 코린트가 처음부터 번성했던 것은 아니다. 코린트에 처음으로 나라를 창업한 사람은 시시포스(Sisyphos)였다. 그는 그리스 민족의 시조인 헬렌의 아들로 아이올레이스족(Aioleis)의 시조가 된 아이올로스와 데이마코스의 딸 에나레테가 결혼하여 낳은 일곱 아들 중의 한명이었다.

아이올로스는 텟살리아 인근 지역의 왕이었지만, 그의 아들 시시포스는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여 펠레폰네소스 반도까지 와서 오늘날 코린토스로 부르는 지역에 에피라(Ephyra)를 세웠다. 그는 거인족 아틀라스의 딸 메로페와 결혼해 아들 글라우코스를 낳았다. 그러고 보면 코린토스의 시조가 되는 시시포스는 꽤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신화기의 인물에 속한다. 그의 활동 시기는 아마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남부에서 미케네 문명이 시작되는 BC 2000년 즈음이나 그 이전일 것 같다.

시시포스의 이야기가 처음 나온 문헌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시시포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바위 굴리기’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모습, Tiziano Vecellio(1490~1576) 1548~1549, 프라도 미술관, 사진 Dodo

시시포스의 신화는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해진다. 하나는 시시포스가 교활한 악당으로 온갖 기민과 비행을 일삼다가 그 죗값으로 저승에 가서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시시포스는 어찌나 교활했던지 저승 세계의 지배자인 하데스마저 감쪽같이 속였다.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던 그는 지하 세계로 가지 않을 비책을 꾸몄다. 만약 죽게 되어 지하세계에 불려가더라도 탈출할 수 있는 방책을 미리 세워두었다. 그는 생전에 아내에게 자기가 죽더라도 시체를 묻지도 말고, 또 울거나 제사를 지내지도 말 것을 당부했다.

그가 죽어 하데스에게 갔을 때 그는 지상에 잠깐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죽은 남편을 위해 울지도 않고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 못된 아내를 징벌하고 오겠다는 명분이었다. 하데스는 아내의 배신에 치를 떨며 보복하고 오겠다는 시시포스의 눈물겨운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게 하데스의 허락을 받고 잠시 지상세계로 돌아온 시시포스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아내와 재회했고,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데스는 그제야 시시포스에게 속은 걸 알고, 헤르메스에게 시시포스를 붙잡아오도록 명령했다. 다시 잡혀온 시시포스에게 하데스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형벌을 내렸다.

무거운 바위를 지하세계에 있는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 가지만, 꼭대기에 다다르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했다. 지금도 시시포스의 형벌은 계속 집행되고 있을 듯싶다. 그의 형벌은 신을 속인 죄 때문에 내려졌지만, 사실 그가 이승에서 갖가지 악행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죄를 속죄하고 정화하게 하려는 신의 응보였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버전은 제우스의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제우스는 강의 신인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에 납치해 갔다. 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애태우던 아소포스에게 시쉬포스는 제우스신의 소행임을 알려주었다. 제우스신은 비밀 행각이 들통 나자 시시포스에게 죄를 물어 바위를 산으로 굴려 올리는 벌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시시포스가 아소포스에게 딸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물이 귀했던 코린토스에 샘을 만들어달라고 청원했고, 그 덕에 페이레네 샘을 얻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승이 전해진다.

페르세포네의 성원을 받으며 바위를 들어 옮기는 시시포스, BC 530년 작품으로 추정, 뮌헨 국립고대미술박물관(Staatliche Antikensammlungen) 소장, 사진 Saint-Pol

시시포스의 신화는 전승되는 과정에서 여러 민담과 뒤섞여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가 왜 그런 형벌을 받았는지에 따라서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 형벌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시시포스가 야비하고 교활한 악행의 주인공이었다면, 그가 받은 형벌은 민중의 희구를 대신한 업보로 여겨질 수 있다. 반면 그가 코린토스에 생명의 원천인 샘을 얻기 위해 신성한 제우스신의 비밀을 공개하고 벌을 달게 받은 것이라면, 그의 고행이 인간들을 위한 아름다운 희생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시포스가 얻은 샘이 페이레네 샘이라는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페레이네가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켕크리아스(Cenchrias)가 죽자 슬픔에 빠져 너무 울다 그만 샘물이 되어 버렸다는 전승도 있다. 아무튼 코린토스가 도시를 이루고 사는 데 샘이 소중했던 만큼 여러 인물과 연관되는 사연을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듯싶다.

페이레네 샘이 누구와 연관되든 관계없이 지금도 맑고 풍부한 수량의 물이 솟고 있다. 해발 575미터로 우뚝 솟은 아크로코린트의 산줄기가 머금은 물이 깊이 복류(伏流)하여 산기슭에서 콸콸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코린토스 유적지 뒤편에 아크로코린토스로 오르는 길의 삼거리에도 큰 우물이 있는데 풍부한 수량의 물이 솟고 있었다. 바위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인지라 매우 차다. 아마 이 수원(水源)의 물줄기가 페이네레 샘과 글라우케 샘으로 이어진 듯싶다.

아크로코린트로 오르는 길에 있는 샘이다. 풍부한 수량의 물이 콸콸 솟는다. 뒤로 아크로코린트(Acrocorinth)가 보인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쪽의 도로로 따라가면 아크로코린트로 올라갈 수 있다. ⓒ박경귀

글라우케 샘,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그 뒤로 아크로코린트가 보인다. ⓒ박경귀

코린토스의 전성기는 참주 페리안도로스 시대일 듯싶다. BC 7세기 중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 집권했던 그는 매우 강력한 독재정치를 편 것 같다. 그는 40년 동안 참주로 코린토스를 통치했고 최초로 호위병을 두었다. 그는 재위 동안 수많은 시민들을 추방하거나 재산이나 목숨을 빼앗는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 그가 자신과 친분이 있던 밀레토스의 참주 트라시불로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나라의 통치법을 물고 배웠던 일은 유명하다. 그가 통치방식을 짐작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이렇게 전한다. 트라시불로스는 페리안도로스의 사자를 곡식밭으로 데리고 나가 손수 곡식 중에서 가장 잘 자라 키가 큰 것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리고 이를 지켜 본 사자를 말없이 돌려보냈다. 사자는 트라시불로스가 한 이런 돌출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며 있던 일을 그대로 페리안도로스에게 보고했다. 페리안도로스는 영리했다. 트라시불로스가 나라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그 나라의 탁월한 자들을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조언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재들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등 만행을 더 많이 저질렀다고 한다.

코린토스가 번영하게 된 것은 해상 활동에서 다른 도시를 앞서갔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말처럼 “코린토스는 해륙 양면으로 시장을 제공할 수 있게 되어 해륙 양면에서 들어오는 세수에 힘입어 부강한 도시가 되었다.” 코린토스인들은 그리스 도시 국가 중 최초로 현대식 함선 건조 방법을 채택했다. 헬라스에서 최초의 삼단노선을 건조해냈던 것이다. 사모스인들에게 삼단노선 4척을 건조해 준 것도 그들이었다. 당시 삼단노선의 탁월한 조선 기술을 가졌던 기술자로 아메이노클레스가 유명했다.

코린토스인들은 7세기에 이미 삼단노선 120척을 갖춘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했다. 그들은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그리스와 알바니아 국경 부근에 있는 케르퀴라 섬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린토스의 조선술을 배운 식민도시 케르퀴라가 점차 재력과 군사력을 확충하자 모국(母國)인 코린토스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의 가장 좋은 부위를 코린토스인에게 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코린토스인들과 케르퀴라인 사이에 BC 660년에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최초의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아무튼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을 대비하여 해군력을 증강하기 전까지 BC 7세기에서 5세기 초까지 해상의 패권은 코린토스와 사모스, 아이기나가 잡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가 테미스토클레스라는 걸출한 장군에 의해 해군력을 급격하게 강화하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니키아 해군이 주축을 이룬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해상 패권은 아테네에게로 넘어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년) 시기에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의 편에 서서 아테네에 맞서고, 아테네가 코린토스에 적대적이던 케르퀴라와 방위동맹을 맺었던 것도 해상 패권 경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코린토스는 아테네에 밀려 쇠락하기 시작했고, 이후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코린토스가 결정적으로 쇠락하게 된 것은 로마의 파괴와 약탈 때문이었다. 로마는 교통의 요지이자 해상 무역의 거점인 코린토스를 차지하기 위해 장군 무미우스를 파견한다. 이들에 맞서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국가들을 아카이아 동맹으로 묶고 스스로 맹주가 된다. 하지만 BC 146년에 로마군에게 대패하면서 코린토스는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하지만 코린토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코린토스 재건이 시작되고 그를 이어 초대 황제로 등극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코린토스가 재건된다. 현재 남아있는 코린토스의 유적은 아폴론 신전을 제외하곤 대부분 로마시대의 것들이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역시 그리스 시대의 것보다 로마 시대의 것들이 더 많다. 지금 번성했던 코린토스의 영화는 간 곳 없지만 7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남아있는 아폴론신전의 위용은 여전히 당당하다.

코린토스 유적지에 남아있는 아폴론 신전, BC 6세기에 건설되고 BC 46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박경귀

주요 묘사물 주변의 빈 공간을 다양한 문양으로 채워 넣는 코린트의 특징적 방식을 잘 보여주는 도기이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스핑크스, BC 550년 작품으로 추정,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BC 6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스핑크스가 그려진 도기,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키벨레 여신의 좌상이다. 로마 시대의 포럼에서 발굴되었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승리의 여신 니케 상, 로마 시대의 포럼에서 발굴되었다. 섬세한 옷 주름의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거인족과의 전투에서 거인족의 머리채를 잡은 아프로디테, 극장의 스케네 건물에 부조되었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극장의 스케네 건물에 부조된 아마존족과의 전투 장면, 아마존 여인의 반달형 방패와 도끼가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로마 시대의 동상들과 모자이크 등이 전시되어 있는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의 제3전시실 ⓒ박경귀

로마 황제의 갑주 상, 흉갑에 고르고의 머리와 세 명의 요정의 부조가 독특하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프리기아인(Phrygian) 포로 기둥 상, 포럼의 북쪽 바실리카에서 발굴되었다. 머리에 이고 있는 기둥 상부에 조각된 코린트식 문양이 섬세하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로마의 원형극장의 유적이다. 많이 훼손되었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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