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2500년전에 메세니아인들이 최고의 경기장 만든 이유가...


입력 2015.07.12 09:58 수정 2015.07.12 12:15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61>헬레니즘 시대에 번성한 메세니아인의 유적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자유인으로 남을 것이냐, 노예로 살아갈 것이냐”는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을 받은 그리스인들에게 던져진 슬로건이었다. 기원전 490년과 480년에 벌어진 2차 및 3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국가들은 페르시아에 굴종하는 대신 자유를 선택했다. 전제적 왕의 노예로 사는 굴종이 아니라 스스로 국가의 일을 처리하는 자유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이런 자유의 열망이 엄청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대군을 몰아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유는 그리스인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다.

자유가 없는 삶은 그리스인에겐 생래적으로 견딜 수 없는 삶이었다. 이런 민족적 기질을 타고났지만, 230여 년 동안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메세니아인들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그리스 민족인 스파르타의 농노로 전락한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메세이아인들은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스파르타에 맞서 3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기원전 7세기에 2차례 봉기했지만 쉽게 진압되었다. 가장 끈질기게 저항했던 반란은 기원전 470년경 발생한 3차 반란이었다.

투키디데스에 의하면 3차 반란은 10년 정도 계속되었고, 기원전 460년에 가서야 겨우 진압되었다고 한다. 후대의 연구자인 폴 카트리지는 스파르타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던 460년대 중반 경에 반란이 발생했고 4~5년 정도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투키디데스의 기술이 좀 과장이 있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메세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3차 반란의 성지는 바로 이토메 산이었다. 이토메 산은 남쪽으로 스테니클라로스 평원을 굽어보는 천혜의 요새였다. 산 중턱 위로는 온통 험준한 바위로 뒤덮여 있어 접근하기도 어렵다. 이토메 산 정상은 자연이 만들어준 최고의 아크로폴리스 역할을 했을 듯싶다.

서쪽에서 바라본 이토메 산에 구축된 메세니아 성벽이다. 뒤에 보이는 암산이 이토메 산이다. ⓒ박경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라코니아 남쪽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 피신해 있던 헤일로타이들이 스파르타인들에게 극심한 학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에서는 어느 신전이든 그 안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다 더구나 그들을 해치는 일은 철저하게 금기시되어 있었다. 신전은 일종의 신성한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그런데 스파르타인들이 이 불문율을 깼다. 그들은 포세이돈 신전에서 헤일로타이들을 끌어냈고, 신성 모독을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했다.

보호받아야 할 신성한 성역에서 헤일로타이들을 강제로 끌어내 처형했다는 것은 신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스파르타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곧 포세이돈 신전을 범한 그 사건에 대한 신의 응징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라코니아 지역의 헤일로타이는 물론 메세이아의 헤일로타이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갖 착취에 대한 분노가 헤일로타이 학살 사건을 계기로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완전 노예는 아니었지만 반 자유인 상태로 차별 대우를 받았던 메세니아 남쪽의 아이타이아와 투리아의 페리오이코이들까지 반란에 가세했다.

메세니아 유적지에서 바라본 이토메 산 ⓒ박경귀

스파르타는 메세니아인들의 결사 항전 때문에 오랫동안 고전했다. 이들이 험준한 이토메 산 정상을 최후의 저항지로 요새화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군은 이토메 산을 완전히 포위했지만, 산악의 요소요소에 진지를 구축한 메세니아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자국의 힘만으로 반란을 제압할 수 없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는 아테네에게까지 지원을 요청했다. 아테네 군이 포위 공격에 능숙하다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의 원군 요청을 받은 아테네는 중장보병 4천명을 급파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키몬이 친스파르타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테네 군의 참전은 예기치 않는 불화를 만들었다. 아테네 군은 자기 스스로 무구를 마련한 중산층 자유 시민이었다. 그들은 메세니아 전쟁터에 와서 스파르타가 맞서 싸우는 적이 야만족이 아닌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자유인이어야 할 그리스인임에도 노예로 전락한 메세이아인들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아테네 병사들은 충격과 혼돈에 빠졌던 것 같다.

이런 동요를 보자 스파르타 군은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아무런 해명도 없이 아테네 군의 철수를 요구한다. 외교적 관례를 어긋나는 이 일로 인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토메 산성의 반란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신변 안전을 보장받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떠나되 다시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파르타와 협상을 했다. 이렇게 해서 끝까지 저항하던 메세니아인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이토메 산을 내려왔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던 메세니아인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자신의 고향 땅에서 완전히 추방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들을 받아줄 곳도 환영해 줄 사람들도 아무도 없는 상황에 처한 그들의 심사는 얼마나 처량하고 암담했을 것인가. 돌부리에 발을 채이며 험준한 이토메 산을 힘없이 내려왔을 메세니아인들을 상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그래도 그들에게 희망이 생겼다. 스파르타인들을 도와주러 왔다가 스파르타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아테네인들은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운 메세니아인들을 도왔다. 얼마 전에 로크리스인들에게서 빼앗은 코린토스 만 북쪽 해안 도시 나우팍토스 항에 메세니아의 최후의 저항군들을 정착시켰던 것이다. 나우팍토스의 메세니아인들은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테네 편에 서서 스파르타에 맞서며 이에 보은했다.

아무튼 끈질긴 저항을 했던 이토메 산의 반란군이 스파르타 군에 완전히 진압됨으로써 메세니아인들의 자유의 쟁취는 무산되었다. 결국 그들의 자유는 기원전 371년 테베의 에파미논다스 장군이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할 때까지 유보되어야 했다.

230여 년 간 노예 상태에 있던 메세니아는 정상적인 사회 발전을 이루기 어려웠다.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 전반까지 군대를 가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자치권과 외교권이 없었다. 일체의 독자적 사회 체제를 갖출 수 없었으니 공공 건축이나 공공 문화가 형성될 수 없었다. 그저 개별적으로 농토에 전속되어 농사를 짓고 수확량의 절반을 스파르타의 지정된 지주에게 바치는 소임만 수행할 뿐이었다.

물론 메세니아인들은 스파르타의 국가 노예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개인에게 전속된 노예처럼 주인의 변덕과 착취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스파르타인을 부양하는 책무만 잘 이행하면 개인적으로 자신이 매여 있는 토지에서 자유스럽게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3세 시기(기원전 228~219)에 6천명의 헤일로타이가 적어도 각자 5므나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재산을 더 축적할 수 있었다한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권리도 없었다는 점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간혹 전쟁에 끌려 나가기도 했는데 함대에서는 노잡이를 했고, 육전에서는 경보병 등 보조병으로 활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는 스파르타의 자유시민 병사들이 부족하게 되자 국가 노예인 메세니아인들을 중장보병으로 복무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메세니아인들이 용감하게 잘 싸울 경우 전쟁이 끝난 후 스파르타인들에게 오히려 살해되곤 했다. 결국 노예 상태에서는 개인의 발전과 탁월한 성취를 꿈꿀 수 없는 참담한 위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젊고 건장하며 게다가 용감하기까지 한 메세니아인들은 늘 스파르타를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메세니아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스파르타인들의 극악한 행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24년에 벌어졌다. 투키디데스는 이 참극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Ⅳ 80). 스파르타인들은 메세니아인들에게 전쟁터에서 스파르타를 위해 가장 훌륭하게 봉사했다고 여기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줄 테니 빠짐없이 출두하라고 포고했다. 자신이 자유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야말로 스파르타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메세이나인들 가운데 용맹하게 싸웠던 청년들 2천명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곧 자유의 몸이 될 것으로 믿고 머리에 화관을 두르고 신전 주위를 돌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린 것은 참혹한 대학살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들은 모조리 제거했다. 어디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메세니아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잘 말해주는 극악한 사건이었다. 투키디데스의 기술이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것으로 본다고 해도 스파르타인들이 용맹한 메세니아인들을 주기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압제를 유지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오랫동안 노예 상태에 놓였던 메세니아인이 독자적인 사회문화를 형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현재 남아있는 메세니아 유적은 자유를 되찾은 기원전 4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억눌리고 잠재되었던 메세니아인들의 재능과 한이 다양한 건축과 조각, 도시 조성에서 마음껏 발휘되었다. 기원전 4세기 이후는 그리스 본토의 문화가 전반적으로 퇴조하고, 문화의 주류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들이 개척한 세 곳의 왕조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메세니아인들은 오히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지배시기에 뒤늦게 전성기를 일구었다.

메세니아는 건국 조상인 여인 메세네(Messene)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녀는 아르고스의 왕 트리오파스(Triopas)의 딸로 라코니아(Laconia)의 왕 렐렉스(Lelex)의 아들인 폴리카온(Polycaon)과 결혼했다. 그녀는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시아버지인 렐렉스 왕이 죽은 뒤 맏아들 밀레스(Myles)가 라코니아의 왕위를 계승하자, 남편 폴리카온에게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을 권유한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남서부로 이주하여 안다니아(Andania)라는 도시를 세웠다. 훗날 이 지역 사람들은 메세네의 이름을 따서 메세니아(Messenia)라고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고구려에서 자기 자식들의 왕위 계승이 어려워지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 소서노가 떠오른다. 메세네는 메세니아 지방에 제우스와 데메테르 숭배 관습도 들여왔다. 메세네가 라코니아의 왕족에 안주하였더라면 메세니아는 훨씬 늦게 태어났을 뻔 했다. 메세니아인들은 나라의 창건자이자 신앙을 정착시킨 그녀의 공로를 기려 메세네 신전을 세웠다.

메세네 신전 유적이다. ⓒ박경귀

고대 메세니아에서 가장 빛나는 유적은 거대한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이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의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의술을 펼치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서서 죽은 후 신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그를 숭배하는 신전이 그리스 세계 곳곳에 세워지고, 그의 의술을 전수 받은 의사들이 상주하는 종합의료센터가 여기저기 세워졌다. 소아시아 페르가몬의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이 가장 이름이 높았고, 코스 섬, 에피다우로스의 성역도 규모와 시설이 뛰어났다.

메세니아 아스클레피오스 성역 역시 이런 세계적인 의료센터 못지않은 규모와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것만 보아도 메세이나인들이 이 성역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성역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능까지 했다. 정방형으로 이루어진 성역의 중앙에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성역의 사각에 설치된 이중 회랑을 따라 140명의 메세니아 저명인사들의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북쪽 입구 계단에서 바라본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의 모습. ⓒ박경귀

북쪽과 남쪽의 회랑은 무려 23개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회랑을 받치고 있었다. 동쪽과 서쪽의 회랑은 21개의 기둥이 세워졌다. 특히 남쪽과 북쪽의 이중 회랑이 만드는 공간의 안쪽에는 종교적 기능이나 공중이용을 위한 공간들이 구획되어 있었다. 공중을 위한 공간은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이었던 만큼 휴식이나 치유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의 사면에 접하여 도시의 중요 시설이 잇대어 시설되었으니 하나의 거대한 콤플렉스 건축물 형태를 띠었다. 성역의 동쪽에는 작은 원형 극장 형태로 지어진 민회 회의당과 의사당, 그리고 공문서 보관소가 위치했다. 서쪽에는 종교시설들이 들어섰다. 남쪽은 공중 목욕장과 무덤 기념물이 있었다. 북쪽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리는 세바스테이온(Sebasteion) 공간이 두 곳이 있었다. 이는 로마 시대에 개조되어 증설된 것으로 보인다.

아스클레피오스를 완벽하게 외호하는 견고한 벽체와 열주가 세워져 있던 회랑 복도, ⓒ박경귀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의 견고한 북쪽 벽체, ⓒ박경귀

동쪽에서 바라본 아스클레피오스 성역, ⓒ박경귀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의 회랑 동쪽에 붙어있던 민회 의사당 ⓒ박경귀

또 성역의 북서쪽 코너에는 아르테미스 오르테이아(Ortheia) 신전과 데메테르(Demeter) 신전이 있었다. 오르테이아 신전에는 메세니아의 유명한 조각가 데메폰(Demophon)이 조각한 대형 아르테미스 여신 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사냥하는 아르테미스 여신 입상 하나가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인 프락시탈레스 원작의 복제품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당대 대가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메세니아아 경제가 제법 여유가 생겼던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아울러 이곳에서 출토된 기둥 양식의 탁월한 조각술도 감상할 수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성역 서쪽에 있던 아르테미스 오르테이아 신전 유적, ⓒ박경귀

사냥하는 아르테미스 여신상,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 프렉시탈레스의 기원전 4세기 원작을 로마시대에 복제한 작품이다.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르테미스 상의 세부이다. 머릿결과 손가락의 섬세한 표현이 탁월하다.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오르테이아 신전의 기둥 양식이다. 꽃장식 문양의 조각이 훌륭하다.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오르테이아 신전 기둥 양식을 복원한 일러스트레이션,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메세니아 유적 중 주목해야 할 또 하나는 스타디온과 이를 둘러싼 거대한 열주와 체육관 팔라스트라(Plastra)이다. 스타디온은 그리스 본토에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대리석 관중석이 잘 축조되어 있다. 현재 산골에 위치해서 그렇지 대도시에 인접해 있다면 각종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해도 좋을 듯싶다. 보존 상태가 좋은 에우다우로스의 원형극장이 오늘날에도 주말에 각종 콘서트가 열리듯이 말이다. 2400여년 된 고색창연한 스타디온에서 겨루는 경주를 관람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흥분될 것 같다.

뒤에는 우뚝 선 이토메 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좌우로 숲이 우거진 낮은 구릉이 감싸고 있다. 탁 트인 앞으로는 올리무 나무로 가득 찬 스테니클라로스 평원이 펼쳐진다. 이 청정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경관은 몸과 열정을 바칠 스포츠 제전을 펼치기에 최고의 환경이 아닐까싶다. 메세니아의 스타디온에 서면 저절로 호연지기가 생기는 느낌이다.

주 경기장인 스타디온과 선수들의 훈련장인 팔라스트라가 갖추어져 있고, 스타디온의 사면을 둘러싸고 거대한 열주를 세워 회랑을 만든 점이 특이하다. 현존하는 그리스 체육시설 중 최고의 시설을 보여주고 있다. 스타디온의 삼면의 스토아와 관중석 사이가 상당히 넓어 대규모 관람객의 이동 편의를 제고하고 있다. 또 그 공간에 승전이나 경기 우승자들의 기념물을 조성하여 관람객들이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뒤쪽의 열주가 만든 회랑은 휴식과 상품 구매, 교육 공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 같다. 아테네에서 체육장의 회랑이 흔히 사교와 교실의 역할을 했듯이 말이다.

메세니아의 스타디온과 부대시설의 규모와 구성 내용을 보면 당시 최고의 종합스포츠센터였을 법하다. 주기적으로 스포츠 제전이 열렸던 올림피아 스타디온 못지않은 시설이다. 메세니아인들은 왜 이렇게 훌륭한 거대 스포츠 콤플렉스를 만들었을까? 230여 년 동안 스파르타의 노예로 굴종의 세월을 살았던 그들에겐 남다른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연마하는 시설과 환경을 조성하게 했을 것 같다.

이런 탁월한 스포츠 유적이 있는 메세니아가 워낙 교통이 불편한 궁벽한 시골에 있다 보니 찾은 이가 많지 않은 게 아쉽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한 낮인데도 대여섯 명 정도에 불과했다. 교통이 편리한 코린트나 아르고스 부근에 이 정도의 유적이 있다면 관광객이 붐빌 터인데 말이다. 메세니아인들은 고대에도 힘겨운 삶을 살았는데 현대에 들어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스타이온 ⓒ박경귀

남쪽에서 바라본 스타이온 ⓒ박경귀

북쪽 스타디온 출입구를 들어서며 바라본 스타이온 ⓒ박경귀

스타디온의 동쪽 열주들 ⓒ박경귀

스타디온의 열주와 프리즈 ⓒ박경귀

스타디온과 팔라스트라로 들어오는 북서쪽 출입문인 프로필라이아와 스타디온을 둘러싼 열주들 ⓒ박경귀

스타디온을 둘러싼 서쪽의 열주들 ⓒ박경귀

남쪽에서 바라본 스타디온을 둘러싼 서쪽의 열주들 ⓒ박경귀

스타디온을 둘러싼 서쪽의 이중의 열주들 ⓒ박경귀

스타디온 옆에 위치한 체육관인 팔라스트라 ⓒ박경귀

스타디온 옆에 위치한 체육관인 팔라스트라 ⓒ박경귀

체육관에서 발굴된 헤르메스 상, 기원전 4세기 초 그리스 원작의 1세기 복제품,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헤르메스 두상, 지역 조각가의 작품이다. 4세기 경 제작,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스타디온 관중석 상단과 열주 사이의 넓은 공간에 시설된 기념물들 ⓒ박경귀

메세니아 유적 가운데 그리스 본토에서 발견되지 않은 독특한 양식의 것이 있다. 2개의 무덤 유적이다. 하나는 도리아식 신전 양식의 무덤 마우솔레움(Mausoleum)이다. 이 묘는 아카이아 지방의 로마 총독이자 사제였던 엘리트 귀족 가문 사이티아데(Saithiade)의 무덤이다. 1세기에서 3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메세니아 도시에서 가족 현저하게 눈에 띄는 위치인 스티디온 남쪽 중앙에 위치해 있다. 스타디온의 지표면과 수평을 맞추기 위해 하단에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마우솔레움을 조성했다.

다른 하나 역시 가족묘인데 사각의 기단 위에 사각의 추 양식으로 높이 올라갈수록 좁게 대리석을 쌓은 후 최상단을 코린트식 기둥 주두를 얹어 마무리 했다. 독특한 양식이다. 그리스 본토에서 이와 유사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에 조성되어 1세기까지 메세니아의 귀족 가문 8명이 안치되었다.

도리아식 신전 양식의 사이티아데의 마우솔레움 ⓒ박경귀

측면에서 본 메세니아 귀족 가문의 사각추 형식의 무덤 ⓒ박경귀

정면에서 본 메세니아 귀족 가문의 사각추 형식의 무덤 ⓒ박경귀

메세니아 귀족 가문의 사각추 형식 무덤의 추정 복원도 ⓒ박경귀

서쪽 체육관의 뒤쪽에서 발굴된 한 묘역을 장식했던 조각, 사슴을 사냥하는 사자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메세니아인들은 스파르타로부터 독립한 이후 비로소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하고 자주적인 문화와 정치체제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헬레니즘 시대를 지나자마자 그리스 전역이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억눌렸던 자유 국가를 향한 욕구는 그들만의 도시국가 문화를 만들어내도록 분출되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 후 3세기까지 그들이 성취한 고대 도시의 건축물, 스포츠 시설, 종교시설 등을 통해 당시 메세니아의 발전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메세니아를 지배했던 스파르타의 고대 유적은 볼만한 것이 별로 없는 반면, 메세니아의 경우 뒤늦게 발동이 걸려 이룩한 고대의 문화적 자산을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청정한 환경에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유적지에 앉아있다 보면 고대 그리스의 원초적 힘이 서서히 몸 안으로 전이되어 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박경귀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