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총선 뜨거운 현장을 가다-서울 용산>
'인물이냐 정당이냐' 기로에 놓인 용산 유권자들
20대 총선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지만, 표심은 여전히 부유(浮遊)하고 있다. 선거판을 주도할 이슈의 부재,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불신 상승으로 부동층만 30%에 이르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역대 어느 선거보다 ‘격전지’가 늘어나고 있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그 누구도 승패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이에 데일리안의 정치부 기자들이 20대 총선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 지역을 직접 찾아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 편집자 주 >
“새누리당이 12년간 했는데도 개발된 건 하나도 없지 않느냐.”
“신의를 저버린 정치인에게 투표할 생각 없다.”
살랑거리는 봄바람 탓일까. 소수점 차이로 갈라선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말해주듯 서울 용산의 민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12년간 애지중지하던 말을 갈아탄 기수와 새롭게 떠오른 기수간의 대결은 이곳을 총선의 최대 관심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용산은 서울의 중심부다. 하지만 위치에 비해 개발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이 때문일까. 이곳은 성향이 뚜렷한 서울의 타 지역과는 달리 보수·진보 성향이 뒤엉켜있다. “어느 당, 어느 후보든 개발만 시켜주면 좋겠다”며 자글자글한 손으로 기자의 손을 어루만지던 노인들의 눈물 섞인 바람도 요동치는 용산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4일 ‘데일리안’이 찾은 용산은 새누리당 황춘자 후보의 ‘배신의 정치 심판론’과 더불어민주당 진영 후보의 ‘인물론’이 혼재하고 있었다.
2인 2색 유세…민심은 ‘여론조사’에 촉각
“오늘은 누가 이기고 있나요?”
용산에서 만난 주민들의 첫 언급은 하나 같이 여론조사였다. 황 후보와 진 후보가 소수점 차이의 초박빙 지지율을 보이고 있기 때문. 당초 용산에서는 ‘진영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파다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 후보가 지난달 15일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후 당적을 바꾸면서, 새누리당 황 후보의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용산을 찾은 4일에는 매일경제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발표한 두 사람의 지지율이 0.1%p 차를 기록했다. 황 후보는 32.1%, 진 후보는 32%다. (3월 31일~4월 2일 용산 거주 만 19세 이상 남녀 514명 대상. 유선전화면접 조사 방식 진행.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4.3%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를 참조하면 된다.) 지역 발전에 대한 욕구가 어느 곳보다 높아서 인지, 총선 관련해서 물으면 오히려 ‘어느 후보가 우세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당시 진 후보보다 0.1%p 높은 지지율을 얻은 것으로 나타난 황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처음에는 여론조사에서 졌고, 접점에 가기도 하고, 현재로선 점점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는데 저는 김무성 대표에게 ‘전국 최다 득표하겠다’고 말했다”며 “여기(용인) 판세가 새누리당이 40%가 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럼 (제 득표율도) 40% 이상 가야하는 것이 기본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아직 목표(투표일)가 멀었으니까 현장 위주로 많이 다닐 것이다. 얼굴을 알리는 것이 내 역할”이라며 현장 유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 후보는 곧장 당원 4~5명과 함께 거리 유세에 나섰다. 차를 이용하지도 않고 직접 발로 뛰어다녔다. 이촌동에 위치한 쌀집과 경로당, 정육점 등을 방문해 유권자들의 손을 잡고 지지를 호소했다. 싹싹하게 먼저 다가가는 황 후보의 모습에 유권자들은 “고생이 많다. 용산 바닥을 다 돌아다녀 봤는데 분위기가 좋더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진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나는 내가 더 잘 나오든 안 나오든 여론조사는 안 믿는다. 시민들 손만 잡아보면 다 안다. 여론조사 같은 건 보지 않고 그냥 뛴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어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이긴다고 자만하면 안 되고, 진다고 의기소침하면 안 된다”며 “처음에 용산에 출마했을 당시 여론조사 결과가 턱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와서 아버지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다 포기했는데, 지역에선 내가 이겼다”고 경험을 비추어 설명했다.
진 후보는 4일 이른 아침 남영역 사거리에서 홀로 선거 유세를 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힘내세요”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힘 되는 말을 던지면 그제서야 웃으며 손을 잡고 대화를 이어갔다. ‘홀몸’으로 다니는 진 후보는 용산구의 더 깊숙한 곳까지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한 유권자는 진 후보에게 “횡단보도 옆 화단이 밖으로 튀어나와서 불편한데 그런 부분을 좀 고쳐달라”고 스스럼없이 요구사항을 말하기도 했다.
“배신의 정치 심판”…황춘자 기대감에 ‘1번’ 지지
두 후보가 용산 바닥 민심을 훑고 있지만, 민심은 반으로 갈리고 있다. 가족과 생계를 꾸리고자 무작정 광주를 떠나 용산에 터를 잡아온 지 30여 년된 이모(남·65) 씨는 이번 총선의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세 번의 선거가 돌아올 때마다 ‘새누리당’ 배지를 단 진 후보에게 마음을 줬는데, 이젠 경쟁 당의 배지를 달고 나타났다.
“진영이 여기서 10년 넘게 했잖아.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 부위원장까지 했으면 노선을 따라가야지. 그런데 공천 못 받았다고 지금 와서 당을 옮기는 건 도리에 어긋나지”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실망스러움이 가득했다. “신의 없는 사람이 정치해서 되겠나. 특히 나 같은 보수주의자 중에 신의 저버리는 사람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라는 비판도 덧붙였다. 이 씨는 이번 총선에서 황 후보에게 표를 행사할 생각이다.
이 씨처럼 당을 떠나 진영이라는 한 ‘사람’에게 12년간 믿음을 줬지만, 돌아온 건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용산에서 생업에 뛰어들고, 오랜 시간 진 후보를 지켜봐온 ‘용산 토박이’의 경우 실망감은 남달랐다.
시장에서 생선을 팔며 생계를 이어오고 있는 최모(여·50) 씨는 “진영? 말할 것도 없이 욕먹지. 한 것도 없는데 안 찍어 줄 거야. 주변에서 배신자라고 난리야. 3선 했지만 지역 발전 위해서 한 게 뭐가 있느냐. 나 말고도 그런 말 하는 사람들 많을 거다. 용산 발전하려면 이제까지 해온 당을 찍어주는 게 맞지”라고 했다. 40대 여성 김모 씨도 “나라, 경제, 장사도 다 망했어. 나는 원래 계속 진영 찍었는데, 이번에는 열 받아서 안 찍을 거다. 배신의 정치 용납이 안 된다”고 맞장구 쳤다.
황 후보도 이러한 민심을 잘 읽고 있다. 용산을 두고 ‘기둥이 빠진 혼돈의 상태’라고 표현했다. 선거사무소에서 만난 황 후보는 “(진 후보의 당적 변경) 아픔이 아직도 있다. 정치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점은 도덕·윤리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보면 민심은 이에 대한 실망감을 한 없이 느끼고 있다”며 “여성으로서 대한민국에서 40년 동안 힘들게 다져 싸워온 것들이 있다. 용산에서 제 ‘진심’을 보여줘야겠다는 일념 하에 현장 위주로 인사를 많이 다니고 있다”고 했다.
‘배신의 정치 심판’ 분위기에 더해 황 후보의 진심을 알아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황 후보 유세 일정 중 이촌2동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은 “(황 후보가) 우릴 잘 보살펴 주고 있다. 매번 고맙다”며 “우리는 우리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잘 챙겨주고 용산 개발해주는 후보가 좋다”고 황 후보를 안아줬다. 그는 조직력을 앞세워 골목골목을 다니며 민심을 청취했다.
진 후보는 이날 기자와 만나 “(당적을 변경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구민들의 각자 주관이고 내가 피해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공천과정이 비공개로 이뤄졌다면 내가 그런 사정을 구민들에게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미 언론에서 이야기를 해서 알고 있는데, 내가 공천 못 받았을 때 나를 지지하는 용산 주민들이 많이 가슴 아파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적 변경에 대해서 내가 변명할 필요는 없다”고 일축했다.
“당은 바뀌어도 진영 영향력은 여전”
진 후보에 대한 용산 주민의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감도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인물론’은 아직까지 굳건하다. 용암시장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안모(여·43) 씨는 “진영 의원 좋아요 좋아. 당을 옮겼어도 3선 하는 동안 지역구를 위해서 한 게 있으니까 여론이 쉽게 돌아설 수는 없다”라고 했다.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박모(남·80) 씨도 “처음에는 여론이 많이 안 좋아서 당을 옮기나마나 무조건 안 된다 그랬다. 그런데 막상 출마하고 나니까 많이들 그전의 정을 잊지 못해서 (진 후보에게 투표를 하게) 될 것 같다. 용산에서 12년 동안 한 게 있으니까”라고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효창동 카페에서 만난 황모(남·27) 씨는 “어느 번호를 달고 나오는지는 상관이 없다. 소신 있게 당을 선택한 진 후보를 지지한다. 이제 정당을 보고 뽑을 시기는 지났지 않나”라고 강조했다. 용산에 살지는 않지만, 다년간의 출퇴근으로 진 의원에게 관심이 있는 이모(남·39) 씨도 “당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그 사람이 지역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할 수만 있다면 진 후보에게 한 표 행사하고 싶은데 아쉽다”고 했다.
앞서 지난달 15일 새누리당은 진 후보를 용산구 공천에서 낙천시켰다. 그는 이번 공천에서 새누리당이 용산구를 여성 우선공천지역으로 선정하며 자신을 컷오프하자 탈당을 결심, 전격적으로 더민주당에 입당했다. ‘배신자 심판론’과 ‘인물론’이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다.
진 후보는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18대 대선 직후 박근혜 대통령직인수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연계 문제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다 장관직을 내려놓으며 ‘짤박’(짤린 친박)으로 분류됐다. ‘공천 보복의 피해자’로 보며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경쟁’에 대해 신물을 느낀 주민들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특히 2030 세대에서 그 느낌은 더욱 강했다. 퇴근길에 만난 20대 여성은 “제가 안 뽑아도 잘 되는 사람은 어차피 잘 되기 때문에 굳이 투표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차피 여론조사 1, 2위 하는 사람 중에 되겠죠”라고 했다. 또 다른 30대 여성은 “정치? 관심 없다. 이런거 물어보는 것도 귀찮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용산구 국회의원 후보는 5명으로 새누리당 황춘자·더민주 진영·국민의당 곽태원·정의당 정연옥·민중연합당 이소영 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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