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따로 있는 국가재난 교육 훈련>다양한 이론·실습
전문가들 "국가 이웃 가정 지키는 것에는 남녀 구분 없어"
크고 작은 각종 재난·지해 사고가 일어나면서 안전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다. 하지만 정작 재난과 재해, 사고를 접했을 때 우리의 대처 능력을 얼마나 될까.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19세 이상 성인들을 대상으로 '재난안전 역량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대응 방법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응답은 절반을 채 넘기지 못했다. 특히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응답비율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들은 군 입대-예비군-민방위 등을 거치면서 형식적으로라도 재난·재해 등에 대한 대처 교육 및 훈련을 받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에 데일리안은 재난과 재해에 대한 여성들의 교육 및 훈련 기회가 전무한 실태를 점검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6월 2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동부권에 위치한 한 민방위교육센터에 들어섰다. 민방위교육 안내를 위해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센터 관계자가 의아한 듯 쳐다보며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가슴에 민방위 표식이 새겨진 녹색 조끼를 입은 그는 난데없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교육체험을 하려고 왔다”고 방문 이유를 설명하자 그제야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며칠 전 민방위교육 체험 차 취재협조를 구한 터라 다행히 별 문제 없이 교육장 안으로 몸을 옮겼다.
여느 민방위대원들처럼 입구 한편에 마련된 ‘교육훈련소집통지서’와 ‘참가증’을 작성해 제출했다. 작성한 종이를 다른 한쪽에서 대기 중인 관계자에게 보여주자 ‘108’이라는 숫자가 적힌 도장을 찍어줬다. 이날 나는 총 122명의 민방위교육 이수 대상자(대원) 중 108번째로 교육장에 들어선 유일한 여성 민방위 대원이었다.
오후 2시. 121명의 건장한 남성들을 뒤로하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 민방위교육 시작 알림과 함께 이어진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은 학창시절 아침조회를 떠올리게 했다. 오른손을 들고 4가지 ‘민방위대원의 신조’를 외치는 것은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영 어색했다. 쭈뼛거리는 나와 달리 120여명의 민방위 대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조를 읊었다. 군 입대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자리에 앉자마자 1교시 민방위소양교육이 시작됐다. 이날 민방위소양교육을 담당한 심재환 강사(육군 예비역 소장)는 우리나라의 안보 현실과 국가 위기 상황 발생 시 민방위 대원으로서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약 40여분 간 강연을 이어갔다.
심 강사는 △정전 △수도 중단 △통신·전력망 파괴 △은행전산시스템 마비 △항공기 방공시스템 무력화 등 북한의 도발과 전쟁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여러 위기 상황을 동영상 등 시각자료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준비해야 한다. 어떤 재난과 재해 상황이 닥치더라도 능력 있는 대원은 국가와 가정 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며 민방위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교육 초반 차분한 분위기에서 교육에 열중하던 대원들은 긴 시곗바늘이 30분을 넘어가자 점차 집중력을 잃어갔다. 동북아시아의 안보정세, 북한의 핵실험과 핵 위협 등 다소 전문적인 설명이 이어지자 몸을 이리저리 비틀거나 손에 꼭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보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평소 이 같은 내용의 강연을 쉽게 접하기 어려운 여성의 입장에서는 지루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 대한민국의 위태로운 안보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후 3시. 2교시 응급처치교육 시간. 학창시절은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응급 상황에서의 대처에 대한 실습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 큰 기대를 하고 교육에 임했다. 교육장에 들어서자마자 난생 처음보는, 사람의 상반신만 있는 흉측한 모양의 심폐소생술 실습인형과 그 옆에 놓인 자동심장충격기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민방위 점퍼를 입은 김의권 강사는 “안전교육은 여러 번 반복해야 기억을 할 수 있고 몸에 익힐 수 있다며 응급상황 발생 시 행동요령을 자세히 설명했다. 실생활에서 충분히 활용 가능한 내용이어서인지 대원들도 교육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간단한 설명 이후 곧바로 실습이 이어졌다. 10명씩 앞으로 나와 강단에 마련된 사람 모형의 실습 도구를 대상으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응급환자 발견 시 119 신고→환자 의식 및 이상 확인→심폐소생술 실시→인공호흡 실시→자동심장충격기 사용 등 앞서 배운 응급처치 요령을 그대로 학습했다.
인형의 가슴 중앙께에 손을 올려 누르니 인형의 가슴이 움푹하게 꺼졌다. "더 세게 압박하세요"라고 김의권 강사가 말했다. "실제로 사람한테 하면 뼈가 부러질텐데"라는 혼잣말에 "죽는 것보다 갈비뼈 부러지는게 낫습니다"라는 말이 돌아온다. '아. 부러져도 되는구나.' 응급처치 상식 중 상식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성인의 경우로 가정해 5~6cm 정도 깊이로 흉부를 압박해야 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왜 이리 힘든걸까. 30회 압박이 조금 버거웠지만 심폐소생술을 배운 초등학생이 길에 쓰러진 60대를 살렸다는 강사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실습에 열중했다.
이날 교육에 임한 민방위 1년차 최모 씨(33)는 “사실 민방위교육에 오기 전에는 예비군처럼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상당히 유익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며 “특히 응급처치 같은 경우는 주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후 3시 50분. 화재예방교육 시간. 지하에 마련된 화재예방교육장에 들어서자 크기별, 종류별 빨간색 소화기들이 눈에 띄었다. 현직에 있는 안전 전문가가 직접 강연에 나서 실제 화재 사고가 발생했던 사례와 각 사례별 올바른 대처요령을 설명했다.
그는 “안전한 나라가 되려면 초등학교부터 재난안전교육과 훈련을 체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학교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사실 주부나 여성들도 민방위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남성들이 직장에 나가 있을 때 벌어진 재난 상황에서 안전을 확보하려면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 소방안전 교육 실태에 대한 쓴 소리와 함께 안전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평소 ‘남일’이었던 화재는 이번 교육을 통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느끼게 했다. 특히 화재 상황에서는 산소를 확보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현장에서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강사의 설명에 또 한 번 교육과 훈련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론 설명이 끝나고 소화기를 직접 사용해 화재를 진압하는 체험적 교육이 이어졌다. 평생 소화기를 사용해 본 경험이 없어 소화기 안전핀을 뽑기 직전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안전핀을 뽑고 손잡이를 눌러 대형 스크린 상에 불이 난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물을 쐈다. 몇 초 후 ‘화재진압 성공’이라는 문구가 화면에 나타났다. 나도 소화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오후 4시 40분. 마지막 4교시는 교통안전교육. 센터 1층 화생방 체험실로 활용 가능한 공간에서 교통안전교육이 시작됐다. 해당 교육을 맡은 이영미 강사는 하루 평균 13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있으며, 이 중 40%가 보행자 사망이라는 통계치를 언급하며 실제 사고 사례 4건의 영상을 보여줬다. 실제 교통사고 현장이 찍힌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보며 대원들은 충격과 공포의 탄식을 내뱉었다.
강사가 ‘무단횡단을 해본 적 없다’, ‘정지 신호에 직진을 해본 경험이 없다’에 해당되는 대원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지만 이에 손을 드는 대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안전불감증 젖어있는 실태가 이 작은 교육장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교통사고 발생원인과 횡단보도 보행행태, 보행자사고 예방대책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보행자이기도, 운전자이기도 한 한 대원의 “안전의식을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는 소감에 적극 공감했다.
민방위 1년차인 이모 씨(34)는 “평소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교통안전이나, 해본 적 없는 소방안전에 대해 교육을 받아보니 1년에 잠깐 하는 교육이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며 “충분히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하고 유익하기 때문에 국민전체에 꼭 강제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끔 교육받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교육에 참석한 기자에 악수를 청한 민방위교육 관계자는 “국가와 내 이웃, 내 가정을 지키는 것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재난안전 교육을 받아두면 유사시 긴박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안전교육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교육 인증 도장이 찍힌 민방위교육 참가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왜 나는 이런 교육을 이제야 처음 받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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