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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마디 말보다 효과적인 ‘패션의 정치학’


입력 2016.09.16 06:58 수정 2016.09.16 07:01        고수정 기자

옷·넥타이 등으로 서민적 이미지·협치 강조

정치적 쇄신 부각 위해 ‘수염’ 기르기도

8월 3일 오후 전주시 완산구 전주화산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당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제4차 전당대회 호남권 합동연설회에서 이정현 당대표 후보가 정견발표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옷·넥타이 등으로 서민적 이미지·협치 강조
정치적 쇄신 부각 위해 ‘수염’ 기르기도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재임 11년간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순간마다 사각형 모양의 핸드백을 가져왔다. 대처 전 총리는 검정 가죽 핸드백을 애용했는데, 회의에서 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고위급 각료들을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대처 전 총리의 이러한 모습을 일컬어 ‘핸드배깅’(handbagging)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 단어는 대처 전 총리의 카리스마를 상징하게 됐다.

패션은 ‘상징’이다. 대중의 관심을 받고 대중에 호소해야 하는 정치인에게는 더욱 효과적인 메시지 수단이다. 정치인은 장소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때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패션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기도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은 성별로 다르다. 여성은 주로 옷·헤어스타일·브로치 등으로, 남성 정치인은 주로 옷과 수염 등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표현한다.

옷은 ‘패션 정치’의 가장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옷 종류별로, 색깔별로 의미를 부여해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성별을 떠나 모든 정치인이 활용하는 아이템이다. 가장 대표적인 ‘옷 정치’는 선거 때 이뤄진다. 현재 새누리당의 상징 색은 빨간색이다. 더불어민주당은 파란색, 국민의당은 초록색, 정의당은 노란색으로 대표된다. 선거 때 후보들은 물론 지원자들까지 모두 자당의 색으로 단장하고 시선을 사로잡고 표심을 호소한다.

‘서민적’이라는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잠바떼기’, 남방을 입는 경우도 있다. 경우에 따라 밀짚모자도 활용딘다. 이는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 전임자인 김무성 전 대표가 대표적이다. 이 대표는 8·9 전당대회를 앞두고 민생행보를 할 때 밀짚모자에 배낭, 베이지색 점퍼를 입고 전국을 누볐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자전거까지 더해져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 연출됐다. 당 내 비주류인 호남 출신의 그가 유력한 후보들을 누르고 당 대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서민적 행보’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된다.

김 전 대표도 8월 대권 행보로 분석되는 전국투어 민생행보를 할 때 희끗희끗한 머리와 허름한 체크 남방 차림을 선보였다. 그는 마을회관에서 쪼그리고 앉아 러닝셔츠 바람으로 속옷 빨래하는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탓에 붙은 ‘무대(무성대장)’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였다. 정연아 이미지테크연구소 대표는 본보와 통화에서 “남방이나 밀짚모자 같은 캐주얼 차림은 ‘자연인’의 느낌을 준다. 세속을 벗어난 서민 행보를 하겠다는 뜻”이라며 “특히 농민을 대표하는 아이템인 밀짚모자로 민심을 살피겠다는 뜻을 패션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김 전 대표는 농어촌을 오가며 트랙터 몰기와 고추 따기 등 민심 읽기에 애썼다.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8월 전국을 누비는 민생 탐방을 했을 당시 덥수룩한 수염과 체크 남방, 밀짚모자 등 서민적인 모습이 주목됐다. ⓒ김무성 페이스북

이런 의미에서 수염도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아이템이다. 김 전 대표의 민생투어에서 옷 말고도 주목됐던 것은 수염이었다. 야권의 대권 주자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도 4.13 총선 이후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네팔로 떠났는데, 귀국할 때 그의 모습은 흰 수염이 턱 밑을 덮고 있었다. 이를 두고 ‘도인 같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정가에서는 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깎기 위해서’다. 선거에서 낙선하거나 정치적 사건 혹은 결단을 앞두고 잠행할 때 수염을 기르는 남성 정치인들이 꽤 있다. 수염을 기르면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면도했을 땐 활동 재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실제 김 전 대표는 ‘왜 면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죄지은 게 많은 것 같아서 수행 차원에서 수염을 안 깎고 있다”고 답한 바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본보에 “낙선하거나 잠수를 타야하는 정치인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수염을 기른 후에 제 모습으로 돌아가면 기사가 많이 나오고, 엄청난 고민 끝에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했다. 정 대표도 “정치적 쇄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때에 남성 정치인들이 수염을 기른다”며 “자신의 좋지 못한 정치적 상황을 ‘포맷’시킬 때 유용하다”고 말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5월 4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을 방문한 정진석 새누리당 신임 원내대표와 인사를 나누며 포용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여성 정치인의 주요 ‘패션 정치’ 아이템은 브로치다. 브로치를 즐겨 착용하는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심플한 정장, 특히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바지 정장에 여성성을 가미하는 나비 모양, 꽃 모양 등의 브로치를 달아 품위를 높이는 동시에 강인하고 성공적인 여성 리더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는 평이다. 박 대통령은 중요한 외교 석상에서도 브로치를 활용한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정장패션을 일컬어 캐주얼(Casual)과 프레지던트(President)의 합성어인 ‘캐주던트 룩’이라는 말이 생겼다. 국회에서도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 손해원 더민주 의원 등이 브로치를 자주 활용한다.

여성 정치인에게 브로치가 있다면 남성 정치인에게는 넥타이가 있다. 넥타이 색을 통해 소속감을 부각하기도 하고, 상대 당의 상징색을 넥타이 색에 반영해 대화와 협치를 강조하기도 한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5월 4일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를 예방할 때 국민의당 상징색인 녹색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 “형님(박 원내대표) 만난다고 일부러 넥타이도 이걸로 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정 원내대표와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가 만난 자리에서는 두 사람이 상대 당 상징색을 담은 넥타이를 각각 매고 나왔다.

한편, 패션 외에도 ‘외모’가 자산이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치인들이 가발을 착용하거나 미용 시술을 하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원책 변호사는 지난 3월 3일 방송된 JTBC ‘독한 혀들의 전쟁·썰전’에서 “머리카락도 심고 주름살도 없앤다. 시술엔 여야 구분이 없다”고 했고, 같은 방송에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고급 시술전문 성형외과나 피부과에서 조용히(한다). 요즘은 외모도 신체 자본이다”라고 말했다.

고수정 기자 (ko0726@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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