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의 균형추 리더십, 한계에 다달랐나
'낀박' 자처하며 견제·균형에 입각한 행보 보였으나
고조되는 계파 갈등에 "당무서 손 떼겠다" 포기 선언
'낀박' 자처하며 견제·균형에 입각한 행보 보였으나
고조되는 계파 갈등에 "당무서 손 떼겠다" 포기 선언
"당내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낀박'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는데 솔직히 기분 나쁘지 않다. 어쨌든 중도 중심의 역할을 상정해서 그런 별명을 붙여주신 게 아닌가."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출 30일 기자간담회)
친박과 비박 사이에 '낀박'을 자처하며 당을 이끌어 온 정진석 원내대표가 '균형추'로서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는 물론 친박 지도부와도 각을 세웠던 그의 최근 행보는 당내 비주류와 연결돼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당무에서 손을 떼겠다"며 예산안 처리, 거국중립내각 구성 등 원내사령탑으로서의 마지막 미션에 주력하고 있다.
정 원내대표는 그간 당내에서는 친박과 비박, 대외적으로는 당·정·청과 야당 사이에서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행보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세력들 사이에 끼어있는 입지였으나, 나름대로 독자적인 역할공간을 확보했다. 당의 주도권이 친박계로 넘어간 뒤에도 때론 비박계의 목소리를 반영해 균형을 맞추려 애썼다. 이정현 대표와는 달리 청와대에 비판적인 의견도 개진했으며, 대야 공수(攻守)도 주로 정 원내대표가 맡아왔다.
현재 그의 행보는 당내 비주류와 잇닿아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당을 허물고 전면적인 재창당에 나서자는 주장에서 교감하고 있다. 정권 재창출의 플랫폼인 새누리당을 허물고 새로운 기반을 갖춰야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원내대표는 10일 공개적으로 대통령 탈당의 필요성을 거론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이날 오전에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대표 사퇴 요구 이후 연일 최고위에 불참하면서 친박 지도부와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대신 정 원내대표는 별도의 기자간담회를 열고 미국 대선 결과,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정마비 사태 등 다양한 국내외 현안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탈당은 대통령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면서도 "거국내각이 구성되면 그 시점에 발맞춰 대통령이 새누리당 당적을 정리하는 문제도 고민해볼 수 있겠다"고 말했다. 앞서 비박계 좌장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7일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탈당을 촉구한 바 있으나 친박계가 주를 이루는 여당 지도부 내에서 대통령 탈당은 아직까지도 '금기어'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다.
또다른 측면에서는 당내 주류인 친박계를 비롯해 박 대통령, 청와대와 궤를 같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날 기자들과의 티타임에서 "야당이 정치과 경제, 민생을 분리해서 대응해줬으면 한다"며 "시장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불확실성이지만 경제 사령탑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 경제팀의 전열을 정비하는 게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공약을 내건 트럼프의 당선으로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증대된 만큼 임종룡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를 한시 빨리 경제사령탑으로 앉혀 대응택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 원내대표를 바라보는 당내 양대 계파의 시선은 엇갈린다. 우선 친박계 내에서는 성토의 목소리가 크다. 김태흠 의원은 이날 친박계 재선의원 회동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최근 당 최고위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는 정 원내대표에 대해 "아주 바람직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다른 친박계 의원은 본보에 "정 원내대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본인이 지도부이면 사퇴를 하더라도 당의 향후 로드맵을 만드는 게 기여를 해야 하고, 최고위 회의에 나가서도 무슨 말이 나오는지 들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비박계는 정 원내대표에게 사실상 사퇴 철회를 요청하기도 했다. '진정모'(최순실 사태 진상규명과 국정 정상화를 위한 새누리당 국회의원 모임) 간사인 오신환 의원은 지난 7일 "원내대표가 사퇴하고 공백이 생기면 지금 이정현 지도부 체제에 대한 리더십 부재와 맞물려 당의 리더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며 사실상 사퇴 철회를 요구했다. 여기에는 그동안 당내 친박계와 비박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온 정 원내대표의 역할이 아직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양대 계파 간 힘겨루기가 지속되며 당이 '심정적 분당' '한 지붕 두 가족'으로까지 비유되는 내분상황에 직면하자 정 원내대표의 균형추 역할은 수명을 다한 듯하다. 정 원내대표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양쪽 계파에서 비판이 나와도 할 수 없다"며 "나는 내 원내대표로서 남은 일정만 수행하고 당무에는 손을 떼겠다는 로드맵을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문제이지 지금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 않냐"고 덧붙였다.
정 원내대표의 중도적 행보는 결국 극심한 계파갈등 구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는 셈이다. 전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 낙인이 찍혀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된 유승민 의원은 비박계로서 친박계의 질타를 한 몸에 받았다. 유 의원의 후임으로 합의추대된 원유철 의원도 공천 과정에서 주로 친박계의 입장을 대변해왔다는 이유로 비대위 전환 과정에서 비박계의 거센 항의를 감내해야 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소위 '계파 대주주'를 적절히 고려하면서 고질적인 주류·비주류의 균형을 함께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어떤 원내대표가 오더라도 이 문제는 극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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