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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핵심은 '정책'…비주류, 차별화한 정책 내걸고 탈당해야


입력 2016.12.26 08:32 수정 2017.01.09 13:23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탈당 사유가 정책인가? 사인 관계인가?

근대적 정당정치 원조 영국 정당들도 정책 중심으로 변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이 2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비박계 긴급회동에서 새누리당 탈당 및 분당 결행을 선언하고 있다. 이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31명은 탈당계를 모아 놓고 오는 27일 탈당 및 분당을 결행 한다고 밝혔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근대 영국의 기반을 마련한 헨리 8세는 모두 여섯 명의 왕비를 두었다. 그 중 두 명이 처형을 당했고, 두 명이 이혼 당했으며, 한 명은 아이를 낳고 12일 만에 죽었다. 단 한 명만 늙고 병든 왕의 병상을 지키며 살아남았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를 남긴 사람은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이다. 영국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이자, 훗날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게 되는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1969년 만들어진 영화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은 한국에서도 개봉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앤과 헨리가 서로 사랑하기 시작한 날로부터 대역죄로 머리를 잘리는 날까지의 천일을 다룬 영화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 리처드 버튼과 쥬느비에브 뷔졸드가 각각 헨리와 앤 역으로 열연한 이 영화는 그해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 감독, 그리고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특히 당당하고 기품이 있으며 누구 앞에서도 할 말을 다하는 앤의 똑똑하고 야무진 캐릭터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1536년 근친상간을 포함한 간통죄를 범했다는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영국에서는 귀족의 사형을 집행할 때에는 칼 대신 도끼로 머리를 잘랐는데, 종종 여러 차례 내리쳐야 되는 경우가 있었다. 한때나마 사랑했던 여인을 위한 마지막 배려였던지 헨리는 칼을 잘 쓰는 프랑스의 사형 집행인을 불러들였다. 사형 집행 당일 아침에 런던 타워의 간수장이 그 얘기를 앤에게 전하자, 그녀는 “나도 들었소. 그리고 내 목이 작으니 다행이에요.”라고 말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영화에서는 궁중에서 벌어진 권력 암투를 앤의 몰락 원인으로 그리고 있지만 극중 앤에게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대사를 하게 하는 등 그녀에게 가해진 혐의가 사실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이 보는 앤의 비극적 결말의 원인은 ‘간통’이 아니라 ‘당파싸움’이다. 그녀는 종교적으로는 복음주의적 교리를 영국 국교회의 교리에 반영시키려 했고, 사회적으로는 토지와 양(羊)의 소유를 제한하는 등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려고 한 ‘개혁적 당파’의 리더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보수적 당파’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이 원인이다. 그녀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당파에 속했던 개혁적 인사들이 다 함께 숙청된 것도 그 때문이다.

혈연․지연 중심의 ‘파벌’과 이념․정책 중심의 ‘당파’는 다르다

우리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조선이 ‘당파싸움’으로 망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당파 또는 붕당(朋黨)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정당정치가 가장 먼저 발달한 나라인 영국에서는 정당의 역사적 뿌리를 바로 위에서 살펴본 앤 불린이 주역이었던 ‘당파싸움’에서 찾는다. 혈연, 지연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상호 권력을 다투는 단순 파벌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 된 것이지만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차별화된 ‘당파’ 또는 ‘붕당’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는 파벌과 같으나 권력을 잡고자 하는 명분이나 이유가 특정한 이념의 실현이나 특정한 정책들을 수립하여 시행하려고 하는 데에 있는 점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은 새누리당이다. 1997년 한나라당으로 창당되어 2012년 현재의 당명으로 바꾸었다. 역사가 이십년 가까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새누리당은 얼마나 근대적인 정당의 정의(定義)에 가까운 정당일까? 새누리당의 강령을 보면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정책정당으로 거듭 태어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인맥 중심의 파벌이 아니라 차별화된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집권하는 명실 공히 ‘정당‘이 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나라 정당법 제2조에서도 정당을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는 조직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정책은 수백 년 전 ‘당파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당을 규정하는 핵심 용어인 것이다.

탈당파는 기존 새누리당 정책 목표에서 벗어날 가능성 거의 없다

새누리당 의원 삼십여 명이 탈당을 선언했다. ‘개혁보수신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들이 탈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내대표 선출과 비상대책위원장 인선을 놓고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관찰해 보면 이들의 탈당 움직임은 본질적으로 잔류파와의 정책적인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른바 ‘친박’이 적반하장 격으로 당의 권력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친박 중심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는, 또는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탈당파는 새누리당을 ‘가짜보수’로 규정하고 ‘진짜보수’를 지향하는 정강을 만들 것이라고는 하나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현재 새누리당의 강령에 나와 있는 성장과 복지의 동시 추구, 공정한 시장경제, 북한과 호혜적 상호공존 관계 추구 등의 정책 목표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충청 출신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향후 정치적 향배에 따라 충청권 의원의 추가 집단 탈당을 점치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도 새누리당의 탈당 사태가 기본적으로 정책이 아니라 사인(私人)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반기문 총장 귀국 후 추가 탈당설은 신당 명분이 정책 차(差) 아니라는 방증

새누리당은 집권여당으로서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이로 인한 탄핵정국의 책임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참에 탈당, 분당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당을 해체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뼈를 깎는 자성과 각오가 있어도 모자라는 판에 책임의 정도에서 오십보, 백보의 차이가 있다 하여 탈당이라는 얄팍한 정치적 계산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사실, 탈당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정당의 가입과 탈퇴가 개인의 자발적인 판단에 의한 다는 원칙도 있거니와, 새누리당을 대신할 새로운 보수 정당의 출현을 원하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탈당은 물론 해체도 불사해야 하고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일도 해야 한다. 다만, 그 모든 움직임이 근대 정당의 존재 의미에 부합해야 하고, 그러려면 ‘친박’이니 ‘비박’이니, ‘친문’이니 ‘반문’이 아니라 ‘정책’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근대적 정당정치의 시초는 19세기 중반 영국의 보수당과 자유당

근대적 정당정치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형성이 그 중심에 있었고 이는 토리 당파의 분열로 비롯되었다. 앞서 17세기말 스튜어트 왕조의 왕위계승을 놓고, 영국 정계는 두 당파로 갈렸다. 스튜어트 혈통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가야 한다는 토리당과 가톨릭교도를 배제해야 한다는 휘그당이 그것이다. 토리는 왕실, 국교회, 지주층의 이익을 주로 대변하고 휘그는 새로 부상하는 부르주아 계급과 비국교회의 이익을 상대적으로 많이 대변해왔다고 그 차이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두 당파 사이의 사회, 경제적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고, 이들 사이에는 뚜렷한 정책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인 정당의 구조도 갖추지 못했지만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정당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유무역 지지한 필 수상이 토리당을 탈당, 진보적 정파를 규합해 자유당 창당

19세기 중반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과로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토리당은 전통적인 지지층인 지주계급의 이익을 위해 곡물법을 만들었는데 이 법은 높은 관세로 무역장벽을 설치해서 외국에서 값싼 농산물이 수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애덤 스미스와 제레미 밴담 등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역행하는 처사였다. 토리당 내에도 자유무역이 영국인들의 이익에 보다 더 적합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일랜드에서 기근이 일어났다.
약 100만 명의 아사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대기근을 맞아 당시 총리직을 맡고 있던 토리당의 로버트 필(1788~1850)은 곡물법을 폐지해서 값싼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국부의 원천이었던 제조업자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싼값의 곡물이 노동자들에게 공급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필요가 있었다. 필은 곡물법의 존속을 원하는 토리당의 다수 의견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곡물법의 폐지를 추진했다. 1846년 영국 의회는 필라이트(Peelite), 즉, 필 수상과 함께 자유무역을 지지한 사람들의 가세로 곡물법이 폐지되었다. 이후 필라이트는 토리당을 뛰쳐나와 휘그, 급진파 등 다양한 정파들과 힘을 합쳐 자유당을 창설하였다. 자유당은 또 다른 자유무역의 걸림돌인 항해법을 폐지하고 면화등 주요 원료의 관세를 없앴으며, 동인도회사 등에 주었던 독점 등의 특권을 폐지함으로써 자유무역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소멸된 자유당의 이념과 정책, 보수당과 노동당이 나눠 계승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에서는 광범위한 참정권을 부여 받은 노동자들이 노동당에게 투표하는 계급투표 성향이 나타나면서, 그동안 노동계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대변해 오던 자유당은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소멸했다. 자유당의 자유주의적 정치 이념과 정책은 보수당에 부분적으로 흡수, 계승되었고, 노동계급에 대한 배려 정책은 노동당이 전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당은 변화하는 시대정신, 경제발전 단계, 정치적인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분당도 되고, 신설도 되고, 통합이나 해체도 되는 존재이다. 다만, 그 중심에는 정책이 있어야 한다. 교과서에 있는 그대로 정당의 목적은 특정한 정책과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를 통해 획득한 정치적 권력을 공약의 실천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공익을 증진시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글/허구생 단국대 교수·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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