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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四君子)는 문인정신이 아니다!


입력 2018.11.02 08:00 수정 2018.11.01 17:05        데스크 (desk@dailian.co.kr)

<신성대의 행간이설> 왜곡된 ‘선비’의 개념과 이중인격적 민족성

<칼럼> 왜곡된 ‘선비’의 개념과 이중인격적 민족성

ⓒ데일리안 DB

흔히들 문인정신을 선비정신이라 여겨 선비의 덕목으로 의리, 지조, 청백(淸白), 청렴(淸廉), 청빈(淸貧)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사군자(四君子)에 빗대어 선비의 덕목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데 사군자가 의미하는 바를 가만히 뒤집어 보면 이것들은 결코 학문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문인(文人)의 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매난국죽(梅蘭菊竹)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절제, 강직, 솔선수범, 희생, 절개 등은 실은 모두 무덕(武德)에 다름 아니다. 글 읽는 선비, 즉 문인들이 지니지 못했거나 부족해지기 쉬운 실천철학이다. 하여 평소 곁에 두고 본받기를 바라는 뜻에서 사군자(四君子)를 선비의 벗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척골추조(鐵骨抽條)! 매화는 검은 철괴(鐵塊)에서 골수를 뽑아내어 가지를 만들어 꽃을 피우고, 장부는 검(劍)으로 겨울바람을 가르며 엄(嚴)으로 자신을 단련한다.

난(蘭)은 연약하나 그 향을 천리 밖에까지 날려 보내니, 사습(射習)은 모름지기 선비의 지(智)에 비할만하다 하겠다.

대나무는 꺾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로 뻗어 오르니, 창(槍)을 잡고 맹렬하게 적진으로 돌진하는 병사의 용(勇)이 그러하다.

風枝露葉無塵垢(풍지로엽무진구)
直節虛心耐雪霜(직절허심내설상)

바람이는 가지 이슬 젖은 잎사귀 때 묻지 않고 티끌 없으니
마디는 곧고 속은 비어 눈과 서리를 견디어낸다.

국화는 찬 서리를 맞으며 꿋꿋하게 제 계절을 지켜내니, 대도(大刀)를 짚고 변방 성곽을 지키는 장수의 신(信)이겠다!

덕(德)은 행(行)이지 말[言]이 아니다.

학문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선비가 되는 것이 아니듯 선비정신을 지식인[文人]의 정신이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병가오덕(兵家五德, 智信仁嚴勇)이 군자(君子)의 덕목에 가깝다. 기백(氣魄)이니 사기(士氣)니 하는 말은 곧 무혼(武魂)이다. 유가오덕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지닌 척 할 수 있는 덕목이지만 엄(嚴)과 용(勇)은 실천으로 밖에 증명할 수 없는 덕목이다. 예로부터 문(文) 속에 무(武)가 있고 무(武) 속에 문(文)이 있다고 했다. 문사(文事)에 종사하든 무사(武事)에 종사하든 모름지기 선비란 상무숭덕(尙武崇德),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온전한 인격체여야 한다는 말이겠다.

게다가 청백, 청렴, 청빈이라니? 도무지 이 시대의 가치관과 맞지 않을뿐더러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입에 담는다는 건 위선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벼슬 못한 조선 선비를 달래려고, 또 녹봉이 적더라도 탐욕부리지 말고 자족하며 살라는 뜻으로 가난한 조선 왕조가 내세운 궁여지책이겠다. 예의염치는 별개의 문제이다. 조선 5백 년 동안 지속된 억무숭유(抑武崇儒)의 정책으로 인해 왜곡된 ‘선비’의 개념과 그 정신이 기형적이고 이중인격적인 민족성을 만들어낸 것이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인은 사(事)이지 사(士)가 될 수 없었다. ‘선비’란 본디 무사(武士)를 일컫는 말이었다. 모름지기 선비라면 칼을 벗 삼을 일이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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