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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의 지나치게 화려한 정치‧외교 수사(修辭)


입력 2018.11.19 09:00 수정 2018.11.19 08:28        데스크 (desk@dailian.co.kr)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뜻이 모호한 APEC공동체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은 없다…포용 강조하지만 정적엔 가혹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뜻이 모호한 APEC공동체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은 없다…포용 강조하지만 정적엔 가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1박 4일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 D.C 공식 실무방문길에 오르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21일 오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출국하기 전 환송나온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류영주 기자

“거듭 말씀드립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강조한 말이다. 충분히 감동적인 선언이고 약속이었다. 취임 1년 반이 지난 지금 그게 잘 지켜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실은 지켜졌다고 할 수도 안 지켜졌다고 할 수도 없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입증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뜻이 모호한 APEC공동체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이 말 또한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주는 희망의 언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공허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그려서 보여줬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 그 자신은 구체적 구상이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헤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문 대통령의 화려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거창한 수사(修辭)는 여전하다. 그는 현지시간으로 18일 오전 파푸아뉴기니 포트모르즈비 APEC 하우스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그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 ‘다함께 잘사는 혁신적 포용국가’를 새로운 국가비전으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정부가 추구하는 포용은 포용적 성장, 포용적 사회, 포용적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배제하지 않는 포용’”이라며 “국민 모두가 함께 잘 살고, 공정한 기회와 정의로운 결과가 보장되며 성별, 지역, 계층, 연령에 상관없이 국민 단 한 사람도 차별받지 않는 포용”이라고 강조했다.

법률가인 문 대통령이 그런 추상적 레토릭을 구사할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의 조력을 받았을 텐데, 표현이 너무 요란하면 진정성이 떨어진다.

말의 성찬이다. 그런데 그게 어떤 형태의 국가라는 것인지는 소개하지 않았다. “포용성의 증진은 APEC 회원국들의 공통 과제”라고 그는 말했다. “앞서서 노력한 국가들의 포용정책과 모범사례가 회원국 간에 공유되기를 바란다”는 자신의 희망도 피력했다. 그러면서 “‘포용적 APEC 공동체’ 달성을 위한 ‘포용성 정책 사례집’ 제작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멋있는 말 같기는 한데 모호성을 걷어내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아마도 ‘함께 잘 사는 사회 나라 세계’를 강조하고 싶은 듯하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으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일까? 어쩌면 밖으로는 세계 평화의 사도가, 안으로는 민족통일의 길을 연 대통령이 되고자 열망하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외교적 수사로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행동강령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존재양식이 (말 그대로) 배제된 이상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꿈이 연상시키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74년에 걸친, 거칠기 짝이 없었던 공산주의 실험과 그 참담한 실패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몽상적 꿈은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요구한다는 것을 공산체제들이 확인시켜줬다. 그들의 꿈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이었다. ‘배제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은 없다

그는 ‘APEC 공동체’라고 했다. 아시아태평양국가들의 공동체라니! 미안하지만 이는 구현할 수 있는 명제가 못된다. 국가들 간의 포용, 그리고 이를 통한 공동체 형성이 정말 가능하다고 여긴다는 것일까?

혹 오늘날의 EU가 성립되기 전 단계에 결성됐던 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uratom(European Atomic Energy Community : 유럽원자력공동체), 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 : 유럽경제공동체, EC(European Community : 유럽공동체) 등의 명칭에서 시사 받은 것일까?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유럽연합조차 ‘공동체’의 문자적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물론 궁극적으로 정치통합까지를 추구한다고 했지만 이미 포기된 구상이다. 브렉시트 (Brexit])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경제공동체로서도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 대통령이 구상하는 APEC공동체는 유럽의 그것과 같지 않다.

배제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포용의 공동체라면 실용성이 아니라 이념성이 강조되는 역내 국가들의 결속형태를 말하는 셈이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공동체’란 용어자체가 ‘획일성’을 전제로 한다. 정말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혹 대통령의 주변에서 이런 생각을 부추기는 것이나 아닌지 섬뜩해진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생각과 신조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성립한다. 대한민국은 국민공동체가 아니라 국민공존체다. 그 속에서 국민이 상생 공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이고 역할이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나라’라는 기치를 내세워 정부가 가치를 독점하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국민의 삶의 양식까지를 정하는 것은 민주적 방식일 수가 없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함께 잘 사는 나라’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물론 정치적 레토릭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문 대통령과 정부의 기세로 보면 정말로 그걸 실현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일 것만 같아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다. 모두가 잘 살게 되면 국가나 정부가 필요할 까닭이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국민 착취‧억압기제라고 주장해 온 국가체계는 소멸하고 근로의 필요‧의욕‧동기도 없어지고 만다.

“그런 의미가 아닌 줄 알지 않느냐”고 따질 것인가? 문재인 정부의 정책 방향, 경제 및 정치적 지향점을 감안하면 그저 사회적 소외계층, 서민층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같지만은 않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의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묻어난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갖가지 명목의 현금 지원 대상‧금액을 늘리는 한편, 대기업과 부자들의 횡포 및 오만을 제어하면 경제 선순환 구조가 작동을 시작하고, 그 상승작용을 통해 모두가 잘 사는 사회로 가는 길이 단축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아무도 배제당하지 않는 ‘포용 세상’을 말하면서도 국내의 정적들에 대한 배려에는 대단히 인색한 행태를 보이는 것으로 봐서도 그의 정치적 지향은 이념적 신조에 보다 부응하는 것 같다.

포용 강조하지만 정적엔 가혹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입니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습니다.”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보수 정치세력에 관용적이지 않다.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한 보수정치세력 응징 의지를 누그러뜨릴 기색이 아직은 없어 보인다. ‘협치’를 몇 차례 강조하긴 했으나 정말 간절히 원하는 인상은 아니다. 야당에 대해 몇 번 제의해 본 것으로 성의를 다했다고 치부하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반면에 북한 김정은에 대해서는 한없는 친애를 표하면서 그 실천의지를 기회 있을 때마다 과시한다. 게다가 갈수록 김정은의 대변자 역할에 깊이 들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휴전선일대의 우리 측 방어‧정찰 시스템을 이완시키는 일에도 과감하다. 우리가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육해공의 재래식 방어체계를, 비록 한정적이긴 하지만 완화 또는 무력화시킨다는 것은 북한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겐 없고 북한에만 있는 핵무기의 폐기문제는 아예 미국에 일임해 버린 분위기다. 그 정도가 아니라 북한의 편을 들어 미국에 압박을 가하는 듯한 언급도 거침없이 한다. 나름대로 전략적 고려와 판단을 한 다음에 하는 말이겠지만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고, 설명도 듣지 못하는 필부들로서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중국에 대해서도 지나쳐 보일 정도로 친근감과 신뢰를 표하고 있다. APEC정상회의 기간 중이었던 17일 한중 정상회담을 열어 한반도 문제에 대한 협력을 다짐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일이 이뤄지는 데는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가 필요한데 그 조건들이 맞아떨어져가고 있다”며 문 대통령을 격려했고 문 대통령은 시 주석의 방한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14일에는 싱가포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대북 제재 완화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보도됐다. 과거의 ‘남방3각 대 북방 3각’의 동아시아 안보체제가 미‧일 대 한‧중‧러‧북한의 구도로 재편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정도로 한반도 주변의 정치‧경제‧안보정세가 구조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문 대통령과 정부가 여전히 ‘굳건한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보지만 문 대통령의 정치‧외교적 레토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한반도를 구상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안전은 실험 대상일 수가 없다. 이제까지 효과가 입증돼 왔던 방향으로 가는 게 옳다. 국민들 삶의 양식과 조건을 통치권자의 신조 때문에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다. 화려한 정치언어가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게 아니라는 점도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아주 당연한 일을 왜 걱정을 해야 하게 됐는지, 국민된 처지가 혼자생각에도 딱하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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