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ICT, 예비결정으로 LG화학 유리해졌지만…USTR 거부권 등 변수도
국내 기업 감정싸움에 배터리 강국 지위 위협 우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전’이 장기화되면서 그동안 한국이 누려 왔던 ‘배터리 강국’의 위상이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국내 기업간 다툼이 중국이나 일본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전’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예비결정으로 LG화학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지난 14일(현지시간) ICT가 SK이노베이션에 대해 내린 조기패소 판결로 10월 최종결정에서도 LG화학이 승소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ICT의 결정이 한쪽의 무조건적인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ICT가 최종 결정을 내리더라도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열려있다.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내 배터리 공급이 중단될 경우, 미국 수요업체들의 피해는 물론 대미 투자 효과도 기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공익’을 앞세운 정무적 판단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 공장에 1조9000억원 규모의 1차 투자에 이어 1조원 규모의 2차 투자도 계획하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를 감안하면 이같은 투자 계획의 무산 여부는 상당한 고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 주지사가 SK-LG 배터리 소송전에서 SK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명문을 ITC에 보내는 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ITC는 지난 2013년 삼성과 애플의 ‘3G 이동통신 특허침해 소송’에서도 애플의 특허침해를 인정해 ‘미국 내 수입금지’를 명령, 삼성의 손을 들어줬지만 USTR이 거부권을 행사해 이를 인정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ITC 최종 결정 이후에 재개될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 소송도 관건이다. 지난해 4월 LG화학이 영업비밀 침해로 SK이노베이션을 제소하고, 같은 해 9월 SK이노베이선이 특허 침해로 LG화학을 제소하면서 맞소송 양상이 된 이 소송은 현재 ITC의 진행에 따라 중지 상태이지만, ITC위원회가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LG화학이 소송재개를 신청하면 재개된다.
법원 소송절차를 진행해 최종 판결까지 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 소송의 결과에 따라 손해배상과 미국 내 특허 및 영업비밀 침해 기술이 적용된 제품의 생산, 유통 판매가 금지되지만, 이 때가 되면 어떤 새로운 기술이 지금의 기술을 대체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무의미한 소송전의 장기화로 서로 이미지만 깎아먹고 기업 역량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대승적으로 협상에 나서 조기에 갈등을 봉합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양측의 소송전은 실질적인 피해 여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정싸움에 가까워 보인다”면서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부적절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을 필두로 한 국내 기업들이 세계 배터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이들 기업이 감정 싸움을 벌이는 동안 중국·일본 배터리 기업들은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 중국의 경우 정부가 보조금을 주면서 배터리 기업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두 회사 모두 협상의 여지는 남겨놓고 있다. LG화학은 전날 ICT 판결에 대한 입장문을 통해 “조기패소 판결이 내려질 정도로 공정한 소송을 방해한 SK이노베이션의 행위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면서도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언급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LG화학과는 선의의 경쟁 관계이지만,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기조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양사는 이미 지난해 9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만나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합의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지만 이번 ICT 판결을 계기로 양사 최고경영진(CEO) 회동이 재차 이뤄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