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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하면 나아지나요?” 반복됐던 스포츠 폭력의 역사

  • [데일리안] 입력 2020.07.10 14:09
  • 수정 2020.07.10 14:10
  • 김윤일 기자 (eunice@dailian.co.kr)

고 최숙현을 비롯한 스포츠 선수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 뉴시스고 최숙현을 비롯한 스포츠 선수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 뉴시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지난해 11월 실업팀 성인 선수 1251명을 대상으로 폭력과 관련된 인권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조사에서 선수들의 33.9%(424명)는 언어폭력을 경험했고 15.3%(192명)이 신체폭력, 그리고 11.4%(143명)는 성폭력까지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점은 조사에 응한 선수들의 구체적인 목소리다. 기타 의견으로 분류돼 부록에 실린 선수들의 목소리에는 “이런 것 좀 조사하지 마세요. 어차피 사실로 안 나오니까” “조사하면 나아지나요? 저희가 알리면 알려지나요? 운동선수는 다 참아야 되는 건가요?” 등 자포자기 심정의 글들이 상당 수 실렸다.


스포츠계의 폭력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잊을 만하면 세상 밖으로 공개되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폐 중 하나다.


지도자와 선배들의 구타, 폭언이 언제부터 시작됐는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스포츠와 폭력은 과거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됐고, 알려진 사례만 집계해도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목소리를 냈더라도 흐지부지 묻힌 게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폭력과 관련해 전환점이 마련된 계기는 1994년 OB 베어스의 집단 항명 파동이다.


그해 9월, OB 윤동균 감독은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패한 뒤 선수들을 집합시켰고 방망이를 들었다. 그러자 선수들이 크게 반발했고 무려 17명의 선수들이 그대로 팀을 이탈했다. 이들은 이틀 뒤 기자회견을 열어 사실을 폭로했고 윤 감독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폭력이 만연해 있던 한국 스포츠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학생이 아닌 20~30대 선수들, 게다가 프로 선수들이 ‘방망이 찜질’을 당한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쉬쉬했던 구타나 기합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실업 선수들의 15%가 신체적인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실업 선수들의 15%가 신체적인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4년, 이번에는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에서 폭력 사건이 터졌다. 당시 여자대표팀 에이스였던 최은경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 6명은 코칭스태프의 반복되는 구타와 언어 폭력, 사생활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통제에 시달리다 태릉선수촌을 이탈했다.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고 있던 한국 쇼트트랙의 이면에 자리하던 폭력과 인권침해라는 후진성이 부각된 일대의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엘리트 스포츠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제기됐고 성적지상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대한체육회는 2009년에야 ‘스포츠 인권보호 가이드라인’ 제정에 나섰고 2년 뒤인 2011년 지침서가 완성됐다.


선수와 지도자 모두가 참고하고 따라야할 가이드라인이 나왔음에도 스포츠계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사재혁의 후배 폭행, ‘빙신’으로 불리며 스피드스케이트의 레전드가 된 이승훈의 후배 상대 가혹 행위 등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리고 ‘미투’ 열풍에 힘입어 지난해 체육계 성추문 폭로 사건이 어렵게 세상 밖으로 나와 큰 충격을 안겼다.


폭로의 시작은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였다. 조 코치는 2014년부터 제자였던 심석희에게 폭력을 가한 것도 모자라 성폭행까지 했다는 사실이 공개돼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쇼트트랙에 이어 이번에는 전직 유도 선수 신유용이 용기를 냈다. 그리고 양궁계에서의 동성간 성추문, 여자 축구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팀 하금진 감독의 제자 상대 성추행 등이 줄줄이 공개되며 지도자들의 추악한 ‘갑질’이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해 인권위원회가 발간한 개정된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스포츠 분야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선수 개인에게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고 운동부 구성원의 사기와 팀워크를 해치며 스포츠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워 궁극적으로 스포츠 발전을 가로막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번에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故(고) 최숙현의 피해와 정확히 일치하는 문구다. 더불어 현재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은 이번 파문으로 인해 팀 해체가 추진되고 있으며, 스포츠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 역시 다시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력의 뿌리를 뽑은 뒤에는 씨앗을 아예 심지 못하게 하는 환경 조성도 중요하다. ⓒ 데일리안 류영주 기자폭력의 뿌리를 뽑은 뒤에는 씨앗을 아예 심지 못하게 하는 환경 조성도 중요하다. ⓒ 데일리안 류영주 기자

최숙현 선수는 사망 직전 무려 6개 기관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호소했으나 적극적으로 그를 보호해준 곳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와 개선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스포츠인들 스스로 반성하고 인식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다.


미국의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미국 스포츠계는 폭력 및 성폭력 발생 가능성이 있는 환경 자체를 조성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한 신고 시, 신원 보장 및 철저한 조사를 할 수 있는 별도의 기구를 두고 있음은 물론 폭력 상황에 대한 대처법과 폭력 발생의 원인 등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정부는 이번 ‘최숙현 사건’을 계기로 보다 엄중하고 명명백백한 조사를 통해 스포츠 폭력의 뿌리를 뽑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함께 만악의 근원인 폭력의 씨앗을 아예 심지 못하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지도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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