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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수출규제 1년-상] '소부장 독립' 필요성 일깨워준 아베


입력 2020.07.21 06:00 수정 2020.07.21 05:36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일본이 타깃 삼은 반도체 생산차질 전무…삼성·SK 시장지배력 재확인

일부 규제품목 자급체제 구축…정부 소부장 육성 추진 '자극제' 역할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전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에서 소재·부품·장비 산업 현장 방문을 마친 뒤 이동하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로 한국에 대한 핵심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한 지 1년을 맞았다. 아베 정부는 한국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에 타격을 입혀 ‘백기투항’을 이끌어내고 싶었겠지만 여전히 한국의 반도체 생산과 수출은 잘 되고 있고, 오히려 정부와 민간이 합심해 대일(對日)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장비(소부장)의 기술적 자립에 적극 나서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이뤄지면서 일본 자동차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는 등 일본발 수출규제의 역풍이 더욱 거셌다. <편집자 주>


지난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요 경제부처 장관들을 이끌고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를 찾았다. 소부장 산업 경쟁력 강화 정책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소부장 2.0’ 전략 발표 장소로 대기업 사업장을 찾은 것이다.


청와대가 아닌 SK하이닉스 사업장이 발표 장소가 된 것은 이곳이 소부장 자립을 위한 대기업과 중소 소부장 기업들 간 적극적인 협업이 이뤄지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소재업체들은 이곳에서 SK하이닉스가 제공하는 장비로 불화수소 시제품 순도를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 불과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일본의 수출규제 소재 중 하나인 불화수소 자급화를 눈앞에 두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소부장 공급 업체들이 다 중소기업들이라 스스로 이런 시설들을 다 갖추기 어려운데, 대기업에서 이런 시설들을 갖춰주니 소부장 육성에 아주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감사를 표했다.


재계에서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국에 제공한 ‘의도치 않은 선물’ 중 하나로 ‘대기업들에 대한 문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 변화’를 꼽는다. 지난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이후부터 문 대통령이 대기업 사업장을 찾아 해당 기업 총수들과 주요 경제 현안을 논의하고 협조를 당부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된 직후인 2019년 7월 7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지난 1년간 일본의 공세에도 우리 경제가 흔들림 없이 버틸 수 있었던 데는 기업인들의 역할이 컸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된 이후 각계 인사들이 일본을 방문해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온 것은 면박만 당하고 돌아온 정부 협상단도, 헛물만 켠 정치인들도 아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지난해 7월 일본이 반도체 소재 3종(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를 시작한 직후 일본행 비행기를 탄 이 부회장은 5박 6일간 일본에 머물며 현지 재계와 금융계 관계자들을 만나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후 삼성이 핵심소재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중국·대만·러시아 등으로 거래선을 다변화하고, 국내에서 대체 가능한 소재 공급 업체를 물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일본 소재업계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도 당장 규제를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물량의 수출허가를 내주는 방식을 통해 자국 소재기업 보호에 나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플래시 등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일본 소재기업들로서는 삼성·SK와의 거래선이 끊긴다면 두고두고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일본 소재기업들이 아무리 높은 기술장벽을 치고 있더라도 한국의 수요 기업들의 지배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공급자가 배짱을 부릴 수는 없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결국 지난 1년간 일본의 수출규제가 국내 산업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타깃’이 됐던 반도체는 그동안 글로벌 수요나 가격적인 요인으로 업황의 등락이 있었으나, 일본의 수출규제에 따른 생산차질로 단 한 건도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여파로 한국의 수출이 계속해서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반도체는 주력 수출품목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468억6400만달러로 일본 수출규제 이전인 지난해 상반기 474억7100만달러와 별 차이가 없었다(1.28% 감소).


일본 수출규제 3대 품목 공급안정 성과. ⓒ산업통상자원부

반도체 업체들이 버텨주는 사이 우리 소재업체들은 힘을 키웠다. 규제에만 몰두하던 정부도 소부장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육성에 나섰다.


정부는 소부장 특별볍을 전면 개정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한편, 올해 2조1000억원의 소부장 특별회계를 신설했다.


액체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솔브레인은 초고순도 12Nine급(순도 99.9999999999%) 생산공장 신증설을 통해 생산능력을 2배로 확대했고, SK머티리얼즈는 5Nine급 기체 불화수소 국내생산에 성공했다.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미국 듀폰의 생산시설을 충남 천안에 유치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생산을 개시했고, SKC도 공장을 신설하고 테스트 단계에 착수했다.


정부는 이번에 발표된 소부장 2.0 전략에서는 좀 더 공격적인 지원책을 내놨다. 지난 1년간 소부장 육성이 ‘일본의 수출규제 대응’ 차원이었다면 이번에 내놓은 전략은 글로벌 공급망(GVC) 재편에 선제적이고 공세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공급망 관리 정책대상을 기존 대일 100대 품목에서 글로벌 차원의 338개 이상 품폭으로 확장하고, 2022년까지 차세대 전략기술 확보에 5조원 이상, 빅3산업에 2021년 2조원 규모의 투자를 추가하는 지원책을 내놨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일본의 수출규제는 결과적으로 그동안 필요성은 제기됐지만 실행은 미진했던 소부장 분야 육성을 본격화하는 일종의 자극제 역할을 했다”면서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적 해결 시도 과정에서 무력감을 느끼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우리 기업들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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