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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감독탐구⑥] 꿈은 이루어진다, 정진영…33년차 배우의 묵직한 출사표


입력 2020.09.11 10:17 수정 2020.09.14 08:00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감독 정진영. 영화 '사라진 시간' 리딩 현장 ⓒ 감독 정진영. 영화 '사라진 시간' 리딩 현장 ⓒ

마음으로 하는 일은 끝내 일을 낸다. 영화 ‘사라진 시간’(감독 정진영, 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다니필름, 배급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이 제24회 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감독 정진영은 데뷔작으로 신인감독 특별언급상, 배우 조진웅은 영화제 대표 섹션인 슈발 느와르에서 남우주연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33년 차 배우가 어린 시절의 꿈을 잊지 않고 연출한 영화, 그런 선배를 도와 물심양면 도운 후배 배우 조진웅, 기존 상업영화 문법에서 벗어난 사색적 영화가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이문 따지지 않고 제작과 배급에 나선 선한 영화인들. 모두가 마음을 합해 좋은 결실을 보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아니었다면 청명한 캐나다 몬트리올 하늘 아래서 열리는 시상식에 선 그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선배의 감독 데뷔에 발벗고 나선 배우 조진웅 ⓒ 선배의 감독 데뷔에 발벗고 나선 배우 조진웅 ⓒ

영화 ‘사라진 시간’은 도교 사상사인 장자의 꿈, 호접지몽을 연상케 한다. 내가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 형사 박형구가 교사 박형구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교사 박형구가 꿈속에서 잠시 형사 박형구였던 것인지, 흐릿한 경계 속에서 우리는 혼돈만 느끼는 게 아니라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감독 정진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답을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질문. 우리는 때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을 잊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한다. 그래도 나다. 그런데 형구에겐 내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는 나와 남들이 아는 내가 다르다. 나는 촉 좋은 열혈형사 박형구이고, 내가 다칠까 걱정하는 잔소리꾼 아내가 있고, 그런 아내에게 제대로 해주는 게 없어 속상한 남편이자 동창회에 나가는 아내에게 엄한 놈이 붙을까 질투하는 못난 남편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박형구는 헛소리할 만큼 정신이 아픈 초등학교 교사이고, 혼자 사는 남자다. 형사 박형구로 화재사건을 조사하던 그 불난 집에 살던 이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경찰서장 아내가 바로 내 사람이었는데, 아무도 모른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형구만 그럴까. 나는, 당신은,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살아가는 걸까.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계속 부딪힌다.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어디를 가도 좇아온다, 정진영의 얼굴을 한 태양이 쏘아보며 묻는다.


'배꼽 도둑' 배우 정혜영과 정혜균(왼쪽부터) ⓒ '배꼽 도둑' 배우 정혜영과 정혜균(왼쪽부터) ⓒ

그렇다고 어렵고 지루한 영화가 아니다. 심각한 질문을 흥미롭게 던질 수 있다는 것을, 심오한 얘기 사이사이에도 웃음이 넘칠 수 있다는 것을 감독 정진영은 보여 주었다. 조진웅이 성심을 다해 박형구, 나의 정체성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정혜균-정혜영 콤비는 그 곁에서 티격태격 만담을 펼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특히나 형사 박형구가 교사 박형구가 되는 변화의 시점에 마을잔치가 벌어지는데, 해학과 골계미 풍년의 난장판이다. 솔잎주 세게 마사고 남의 집에서 잠 한 번 들었다가 이제까지 살아온 내 시간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사라짐 직전에 잔치가 벌어졌고, 안 간다 안 간다 하다 참석했고, 마시지 않겠다 않겠다 하다가 마셨고, ‘시간이 사라졌다’.


잔치는 소멸의 잔치이기만 하진 않았다. 깨고 나니 형구에게는 새로운 삶이 생성돼 있었다. 직업이 새로 생겼고, 없던 병도 생겼고, 불난 집 안주인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던 복지관 강사와 연이 닿는다. 변화를 받아들여 할 것인가, ‘사라진 시간’ 속의 나를 고집해야 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2020년 오늘의 상황과 닮아있다. 코로나19로 당연했던 삶의 모습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진 요즘, 우울과 절망에 빠진 박형구처럼 코로나 블루를 앓고 있는 우리, 새로운 패러다임의 일상을 받아들이고 다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 그대로다.


마을잔치 장면에서 슬레이트를 치는 감독 정진영 ⓒ 마을잔치 장면에서 슬레이트를 치는 감독 정진영 ⓒ

데뷔작으로 세계적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정진영 감독은 “데뷔작으로 상을 받게 되어 영광이다. 선문답을 던지는 낯선 영화를 반갑게 맞이해주신 영화제 측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짧지만 진심 어린 답변. 영화의 결만 보아도 자화자찬에 능한 감독이 아니다. 영화를 제작한 ㈜비에이엔터테인먼트의 장원석 대표에게 ‘사라진 시간’의 시작부터 곁에서 본 감독 정진영에 관해 물었다.


“감독님의 시나리오에 매료되어 배우분들, 스태프분들 모두가 재능 기부의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다수의 제작 속에 매너리즘을 경계하던 즈음에 맞이하게 된 ‘단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수상이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들었던 열정에 대한 칭찬 같아서 너무 기쁩니다.”


연기를 마친 어린이배우 정진규를 안아 주는 감독 ⓒ 연기를 마친 어린이배우 정진규를 안아 주는 감독 ⓒ

진심으로 칭찬하고자 할 땐 말이 샘솟는다.


“왕성하게 배우 활동을 이어온 선배님은, 실은 어렸을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습니다. 이런저런 현실적 이유로 미뤄왔던 그 오랜 꿈을 실현하시는 내내 행복한 꿈을 꾸듯이 현장을 즐기셨어요. 당신의 꿈이, 또 늦은 데뷔가 나쁘지 않다는 칭찬을 받으셨으니 매우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감독님은 겸손합니다. 많은 현장 경험이 있는 선배 배우임에도 신인 감독으로서는 한없이 겸손하셨습니다. 감독님은 성실합니다. 배우로서도 매우 성실하시고 진중한 스타일인데, 감독으로서는 어떤 초인적인 성실함을 보이셨어요. 오랜 꿈을 성취하는 데서 나오는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감독님은 자기 주관이 뚜렷합니다. 본인이 시나리오를 쓰며 그렸던 이야기를 여러 변수가 발생하는 현장에서 끝까지 잘 지켜나가셨어요.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감독님입니다.”


영화 '사라진 시간' 촬영현장에서 감독 정진영 ⓒ 이상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사라진 시간' 촬영현장에서 감독 정진영 ⓒ 이상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장원석 대표의 답변에 감독 정진영에 대한 존중과 다 함께 나누는 기쁨이 배어있다. 겸손, 성실, 에너지, 주관을 갖춘 신인 감독 정진영. 다음번엔 또 어떤 술을, 어떤 새 부대에 담을지 궁금하다.


다만, 제작사는 비에이엔터테인먼트가 아닐까. 제작실장-단역배우로 만난 하정우와 ‘577프로젝트’ ‘허삼관’ ‘터널’ ‘보스톤1947’을 함께하고, ‘끝까지 간다’로 만난 김성훈 감독과 ‘터널’ ‘킹덤’으로 이어가고, 배우 마동석과 ‘악의연대기’ ‘범죄도시’ ‘성난황소’ ‘악인전’ 등을, ‘범죄도시’의 강윤성 감독과 다시 한번 ‘롱 리브 더 킹’, 배우 조진웅과는 ‘끝까지 간다’ ‘대장 김창수’에 이어 ‘사라진 시간’을 작업하는 제작사인 만큼 정진영 감독과의 재회를 기대한다. 신작에서도 윈-윈의 상생을 응원한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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