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경협 아이디어 차원이라는 산업부
상명하복에 살고죽는 공무원 결정 아냐
파일작성 시점 文대통령 방북 직후 주목
"우리나라 공무원 조직의 상명하복 분위기를 아는 자라면 '북한 원전 건설 아이디어를 실무진이 냈다'는 산업통상자원부 해명에 코웃음 칠 것이다. 정치적 이슈가 될 수 있을 만한 민감한 사안을 장관도 아닌 일개 공무원이 자기 마음대로 파일로 만들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던지는 분위기가 아니다. 분명 윗선 개입이 있었을 것이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한 국회의원은 기자와 통화에서 이같이 확신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례적으로 휴일에 긴급 브리핑을 열어 '북한 원전 검토는 단순히 경협 아이디어 차원에서 낸 것'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했지만 오히려 후폭풍만 가중되고 있다.
취재 결과 정부부처에 자료를 요청해본 경험이 있는 국회의원들과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일개 공무원이 나서서 북한 원전 건설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아이디어 차원에서 청와대에 제안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반응들이 대체로 많았다.
북한 원전 건설 파일이 작성된 2018년 5월은 문재인 대통령은 경색된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및 판문점공동선언 등 대북 정책을 예민하게 조율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 산업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을 동원해 월성 1호기를 폐쇄하는 등 탈원전 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국가 정책 전체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을 공무원이 가볍게 아이디어 차원에서 청와대에 던질 수 있을까? 더욱이 탈원전 정책 주무부처인 산업부 실무자가 대통령 탈원전 추진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원전 건설 정책을 역으로 대통령에게 제안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
수사와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긴 하지만 '윗선 지시'가 있었다고 보여지는 정황은 이미 충분히 나왔다. 재판에서도 '심증'을 주관적 의식이라고 보는 것과 달리 '정황'은 주요 사실 증명에 간접적으로 이용되는 증거로 삼고 있다.
먼저 남북정상회담 경제협력 핵심 의제가 '북한에 발전소를 건설해 전력을 공급하자'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2018년 4월 27일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건넨 USB에는 발전소 관련 내용을 담은 신경제구상이 책자와 PT 영상 방식으로 담겨 있는 점은 이미 청와대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산업부 공무원의 북한 원전 건설 파일 작성 시점(2018년 5월)이 문 대통령 방북 직후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합리적 사고력을 갖춘 국민이라면 발전소 주무부처인 산업부에 누군가 지시를 내렸다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런 지시도 없었는데 산업부 공무원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대북 원전 건설을 구상하고 'BH(청와대) 송부'라는 문건을 만들었을까.
또다른 정황은 정부여당과 산업부 해명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31일 더불어민주당 윤준병, 신영대 의원은 "북한 원전 건설이 박근혜 정부 때부터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고작 하루 뒤인 1일 산업부는 "요즘에 새롭게 만들었다, 박 정부 때 만든 게 아니다"고 발표를 했다.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물타기를 하려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논란 당사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관련 자료를 감추고 있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했다는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지만 청와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떳떳하게 자료 공개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안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관측된다. 검찰은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에 대해 구속 영장 청구를 검토하는 동시에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도 조만간 소환해 조사할 예정이다. 금방 밝혀질 문제를 일단 가려놓고 보자는 식의 태도는 결과를 바꿀 수 없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지금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