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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㉖] 일본이 만들어낸 뤼순전투의 환상


입력 2021.04.27 14:00 수정 2021.04.27 13:57        데스크 (desk@dailian.co.kr)

러시아 함대의 여순항 탈출 시도ⓒThe Graphic, July 2, 1904.(The British Newspaper Archive)

지금도 뤼순항 인근의 203고지라는 곳에 가면 총탄 모양의 ‘충혼비’가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뤼순전투 당시 203고지 점령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그 크기와 특징적인 모양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비는 일본이 러일전쟁 특히 뤼순전투 당시 203고지 전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현재 있는 충혼비는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이 기념비의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일본 육군에서 사용하던 30년식 소총의 탄환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병의 개인화기를 소총이라고 하는데, 203고지의 기념비를 당시 일본 육군의 소총탄을 본떠 만든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203고지를 보병 돌격으로 점령했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수많은 일본군은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돌격했고, 약 1만여 명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뤼순전투 당시 죽은 병사가 약 3만 명인데 3명 중 1명은 203고지를 향해 돌격하던 중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그들이 들고 돌격했던 30년식 소총이 점령한 고지라는 상징적 의미를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이후 일본의 국민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서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시바 료타로는 러일전쟁을 무대로 ‘언덕 위의 구름’을 집필하면서 당시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에 대해 “메이지 국가는 일본 서민이 국가라는 것에 처음으로 참가할 수 있었던 집단적 감동의 시대였고, 말하자면 국가 그 자체가 강렬한 종교적 대상이 됐다. 203고지에서 일본군 병사가 경탄할만한 용감성을 발휘한 근저에는 이러한 역사적 정신과 사정이 깃들어져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메이지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애국심을 마치 종교적 신념처럼 묘사한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러일전쟁을 성전으로, 전사는 순교로 포장했다. 시바 료타로의 뤼순전투 특히 203고지 전투에 대한 묘사는 당시 전투를 지휘한 노기 마레스케와 고다마 겐타로를 비교하면서 더욱 극적으로 변했다. 시바 료타로는 노기 마레스케를 무능력한 우장(愚將)으로 묘사한 반면 고다마 겐타로의 경우 탁월한 지휘관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러일전쟁 직후 일본 언론은 노기를 뛰어난 인품을 지닌 메이지시대 군인의 본보기로 묘사했다. 특히 그의 두 아들이 러일전쟁 중에 전사했고, 그중 차남 야스스케는 바로 203고지 전투에서 전사했기에 그에 대한 초기 비판은 상당히 수그러든 상태였다.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뤼순전투에서 승리하자 노기는 일본의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전후 세계 각국에서도 그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각종 훈장을 수여했다. 결정적으로 언론에서 뤼순전투 이후 러시아군 포로 처우 등에 대한 노기의 신사적 행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면서 그를 명예를 중시하는 신사적인 군인으로 평가했다. 그는 러일전쟁 이후 명실상부 일본을 대표하는 군인이 된 것이다.


또한 언론에서 묘사한 노기는 모든 전공(戰功)을 독식하는 장군이 아니었다. 언론상의 노기는 병사를 전쟁 도구로 여기지도 않았고,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 국민의 희생을 통해 이뤄진 것이기에 진정으로 슬퍼하는 인간적인 장군이었다. 언론에서는 그가 전몰 장병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자결까지 결심했으나, 메이지 일왕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까지 보도했다. 당연히 이를 만류하는 것은 일왕이어야만 했다. 전쟁터로 그들을 내몬 것은 결국 일왕이기에 만일 노기가 자결한다면,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 일왕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은 일왕이 ‘자결하더라도 자신이 죽은 다음이어야 한다’면서 노기를 만류하였다고 묘사했다. 이처럼 노기는 당시 언론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영웅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군사력 비교ⓒThe Graphic, Janurary 23, 1904.(The British Newspaper Archive)

최근 우리나라의 한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서 러일전쟁과 203고지 전투 등을 설명하면서 당시 언론이 만든 노기의 모습과 시바 료타로가 소설에서 묘사한 러일전쟁 내용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인용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전문가가 부연 설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기의 지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일본 육군은 대만 총독 출신의 고다마 겐타로에게 지휘를 맡겼고, 고다마 겐타로는 노기의 돌격 위주 정공법에서 벗어나 해안포를 투입하여 결국 203고지와 뤼순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시바 료타로가 소설 속에서 묘사한 무능력한 노기, 그리고 203고지 전투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당시 언론 보도 속의 노기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속 노기 그리고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에 가까운 입장에서 설명한 역사 관련 프로그램 속의 노기, 과연 어떤 노기 마레스케가 실제에 가까울까? 당시 뤼순에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전투에 대한 역사이므로 당연히 군사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일본 해군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지 못하였고, 결국 육군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 육군은 노기를 지휘관으로 삼아 3군을 편성하여 뤼순 방면에 투입한다. 즉 일본 해군의 작전 실패와 육군의 투입 그리고 작전의 장기화라는 뤼순전투의 전개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기의 3군은 총 4차에 걸친 총공격 끝에 뤼순의 외곽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결국 뤼순의 러시아 수비군이 항복한다. 이때 시바 료타로의 소설 속 묘사처럼 일본 육군은 중포를 공격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만으로 러시아군의 진지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 결정적 피해를 입힌 것은 시간이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일본 중포를 능가하는 대포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함포였다.


뤼순항에는 많은 러시아 군함이 정박해 있었고, 이 러시아 군함에는 많은 숫자의 함포가 탑재되어 있었다. 뤼순 전투에서 이 함포들은 방어 작전 시 직간접적으로 지원 사격에 투입되었고, 여기서 발사한 함포는 일본 육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러시아 군함의 함포 지원은 일본 육군의 3차 공격 이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지원할 수 있는 탄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3차 공격 때 러시아군은 거의 수류탄과 소총에 의지해 전투를 지속했다. 4차 공격 당시에는 그마저도 대부분 떨어진 상태였다. 사실상 2월부터 포위된 러시아군은 탄약 등의 물자를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의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것 역시 4차 공격 때였다. 고다마 겐타로가 부임한 때가 바로 4차 공격 당시였다.


뤼순전투가 종료된 이후 항복문서에 조인할 당시 남아있던 러시아 수비군은 약 32,400여 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던 전체 탄약은 207,855발이었다. 잔여 탄약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부 소총탄이라는 가정 하에 개인당 탄약 수를 개산하면 러시아군은 개인당 약 6발 정도의 탄약만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탄약을 거의 소진한 상태였던 것이다. 청산리 전투 당시 일본군이 1회 전투 시 필요한 소총 탄약량을 200발로 계산한 것에 비교하면 그 양이 얼마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뤼순항은 개전 직후 일본 해군의 기습으로 고립되어 약 11개월간 방어전을 지속했다. 5월 이후에는 육상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뤼순 요새는 그로부터 12월까지 전투를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는 결정적인 계기를 일본의 발트함대 격파와 뤼순항 점령이라고 설명한다. 일부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연합함대를 뤼순항에 11개월간 붙잡았던, 그리고 5월부터 약 3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일본 주력부대를 소진시킨 뤼순항 전투가 과연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지 아니면 이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망까지 잘못된 길을 걷게 된 시작이 되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시바 료타로가 소설 속에서 창작한 역사를 사실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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