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9개월 만에 법정 섰지만…눈감고 졸다 "가슴 답답하다" 호흡곤란 호소 중도 퇴정
"유족들에게 사과안하냐" "발포 명령 부인하냐" 취재진 질문에 '묵묵부답'
재판장이 직업 묻자 "현재는 없다"…"전직 대통령이셨죠" 질문에 "네" 즉답
법원 일대 오전부터 광주시민 모여 규탄 시위…"반성 한마디 안하고 떠났냐" 오열
"살인마 전두환, 거짓말쟁이 전두환이 곧 올겁니다. 얼마나 뻔뻔한 놈인지 두 눈뜨고 지켜봅시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광주시민 여러분 두 눈 똑똑히 봐주십시오!"
입추(立秋)가 지났지만 전국적으로 폭염은 계속됐다. 9일 오후 12시, 광주지방법원 앞은 32도를 웃도는 뙤약볕의 무더운 날씨에도 성난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날 오후 2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항소심 공판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오전부터 현장에 모여 전씨를 엄벌해야 한다고 목놓아 외쳤다.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법원 일대를 빙 둘러 인간벽을 세운 경찰들은 고성을 지르거나 도로에 난입하려는 시민들이 나타날 때마다 이를 저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일부 시민들은 "너네가 뭔데 전두환을 끼고 감싸냐" "그XX 때문에 경찰이 이렇게 많이 출동했냐"며 경찰에 불만을 표출했다.
이날 현장에서 '학살 원흉 전두환을 처벌하라'는 피켓을 들고 규탄 시위를 벌인 대학생 김씨(20대·남)는 "전두환은 광주에 두 발로 걸어와선 안 된다. 어떻게 당당하게 다닐 수 있냐"며 "본인의 학살 책임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고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광주시민 최씨(30대·남)는 "전씨는 광주에 재판을 받으러 왔다지만 그 어떠한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며 "전두환의 끝은 구속이어야만 한다. 무릎 꿇고 사죄해야 광주사가 끝난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광주 시민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라"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앞서 전씨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됐다. 그는 2017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라고 적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전씨에 대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전씨 측은 '사실오인이 있었다'고 주장했고, 검찰은 '형량이 가볍다'며 각각 항소했다. 전씨는 2차례 진행된 항소심 공판기일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출석하지 않다가 "재판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재판부의 경고가 떨어지자 이날 법원에 출석했다.
전씨는 오후 12시 44분께 광주지법에 도착해 경호 인력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승용차에서 내렸다. 지난달 5일 연희동 자택 인근에서 꼿꼿한 자세로 홀로 산책을 하고, 자신을 촬영하는 기자를 노려보며 "당신 누구요!"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지만 불과 1달 사이에 노쇠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호원 2명의 부축을 받으며 법정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전씨는 "광주시민과 유족들에게 사과하지 않겠느냐" "발포 명령을 부인하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이번 공판은 사전에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방청권 응모를 받고 당첨된 20명에게만 방청권을 배분했다. 수많은 시민이 선착순에 들기 위해 법원에 한꺼번에 몰리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날 재판을 방청하러 온 광주시민 장씨(60대·남)는 "5.18 책임자가 처벌받는 역사적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보러 왔다"며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수도 있다니 재판에 오는 기회주의적 발상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꼬집었다.
재판 시작 시각에 맞춰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전씨는 여전히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힘겨운 걸음으로 피고인석에 도달했다. 그는 힘없이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피더니 동석한 이순자 여사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법정 내부는 만일의 돌발상황에 대비해 사방에 배치된 방호인력이 긴장의 끈을 조이고 있었다.
재판은 피고인이 본인임을 확인하는 인정신문으로 시작됐다. 재판장이 이름을 묻자 전씨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재판장은 "피고인 잘 안 들립니까?"라고 재차 묻다가 보청기 착용을 지시했다. 재판장의 거듭된 질문에 전씨는 말 한마디 하기도 벅차다는 듯 "전.. 두.. 환.."이라고 느리게 대답했다.
이어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전씨는 느리게 "현재는 직업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재판장이 "지금은 무직이고, 전직 대통령이셨죠?"라며 지나가듯 던진 질문은 놓치지 않고 "네"라고 즉각 대답했다.
주소와 본적을 묻는 질문에는 스스로 답하기 어려운 듯 이 여사가 옆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떠듬떠듬 따라 말했다. 전씨는 인정신문이 끝나고 몇 분 채 지나지 않아 고개를 살짝 떨구고 두 눈을 감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전씨측은 5.18 헬기 사격은 허위인 만큼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라고 지칭한 게 모욕은 될지언정 사자명예훼손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날 증거조사 및 증인 채택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재판부는 전씨 측이 신청한 헬기 조종사 9명 가운데 4명만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나머지 증인들은 90세가 넘는 고령이어서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혹은 1심에서 이미 증언을 마쳤다는 이유였다.
전씨측이 신청한 현장검증 조사도 기각됐다. 재판장은 "40년 전 전일빌딩에서 일어난 상황을 동일한 조건에서 재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고 군부대에서 해줄 의무도 없다"며 "실익이 없어 채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재판이 시작되고 20여분이 지나자 재판장은 전씨를 향해 "피고인 호흡이 불편하시냐" 물었고 동석하고 있던 이 여사는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오늘 식사를 못 하셨다. 가슴이 답답하신 것 같다"고 대신 말했다. 재판부는 전씨에게 법정 밖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라고 지시하면서도 "재판이 금방 끝날 것이니 귀가하지 말고 대기하라"고 덧붙였다.
전씨가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방청석 곳곳에서는 '허' '참나' 등 불만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한 방청객은 "기가 막히네 염X, 참말로 뭔 지X를 하고 있냐, 겨우 20분만에 빠져나가냐!"라고 외치며 분통을 터뜨렸고 방호관에 의해 퇴정 조치됐다.
이어 10여분 동안 남은 증인채택 절차를 마친 재판장은 "검사님께 참고로 말씀드리면 재판 지연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증인 신청이 많아지면 일주일에 2번도 재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다음 기일인 오는 30일부터 증인신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전씨는 이날 인정신문에 나온 만큼 다음 재판부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법원을 나온 전씨는 "유족들에게 한말씀 해달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일절 대답하지 않고 차에 탑승했다. 법원 밖에서 전씨를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은 전씨가 이미 법원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자 "이게 무슨 일이냐" "반성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났냐"며 오열했고, 일부는 경찰에게 삿대질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법원 일대를 둘러싸고 있던 경찰은 전씨가 법정을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차례차례 철수했다.
한편 이날 재판을 지켜본 조비오 신부의 조카이자 고발인인 조영대 신부는 "전씨가 제발 자신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더 이상 거짓으로 일관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죄하기를 바란다"며 "여전히 무죄를 고집하는데 하늘을 가릴 수 없고 역사의 진실을 덮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