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文에 압도당한 親文 嫡統들
대장동 여파 뒤늦게 덮쳐왔나
산적 분탕 칠 때 시장은 어디에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골수친문과는 거리가 먼 이재명 경기지사가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최종 확정됐다. 그는 세 불리할 때는 친문에 대한 ‘친애’를 강조했으나 충성도가 높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2017년 문재인 당시 후보와 대선 후보 경선을 벌이면서는 감정대립의 분위기까지 조성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그가 친문이 대거 포함된 지역 대의원과 권리당원들로부터 압도적 지지(광주·전남에서만 이낙연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패배)를 받아낸 것은 기이하기까지 한 현상이다.
이 후보에 비해 경쟁자였던 이낙연 전 후보는 추미애·정세균 전 후보와 함께 친문 적통(嫡統) 친문, 정통 민주의 기치를 내걸었었다. 현실적으로도 이·정 두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추 후보는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지근거리에서 문 대통령을 보필한 친문패밀리 세 사람이 비문(非文) 이 지사에게 나가떨어진 것도 상식인들의 상상력을 비웃는 희한한 결과다.
非文에 압도당한 親文 嫡統들
상황이 이에 이른 이상 친문(親文)의 중심은 문 대통령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감지는 되되 몇몇으로 특정하기는 어려운 사람들의 손)이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지난번 대선 때 문 후보를 가리켰던 것처럼 이번엔 이 지사를 가리켰을 것이라고 해서 그리 과한추측은 아닐 것 같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일찌감치 이 지사 캠프의 무게 중심으로 좌정한 상황이 풍기는 인상도 그렇다(보이지 않는 손의 설계가 아니라면 대세에 붙는 생존 본능이 작용한 것일까?)
이것이 ‘문재인 정권’의 진실에 가까운 구조라면 문 대통령도 공기 돌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친문 마패’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 대통령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말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가 따로 존재한다면 문 대통령은 앞으로 위험한 역할을 주문받을 지도 모른다. 민주당 대선 후보 확정 이후의 제1호 위험 요인이 그것이다.
이낙연 후보로서는 지금도 자신의 패배를 믿기 어려워 할 법하다. 정치적 경력이나 위상, 정권에 대한 충성도, 지역 이점(利點: 민주당의 본거지 출신) 어느 면으로 봐서도 이 지사는 상대가 안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첫걸음부터 이 지사에게 여지없이 밀렸다. 심지어 대장동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분위기에서도 이 지사의 득표력은 압도적이었다. 정 전 총리가 나가떨어지고, 끝까지 겨뤘던 이 전 총리도 고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은 동심원이 넓어질수록 크게 약화되는 경향을 드러냈다. 10일 발표된 서울 순회경선과 3차 슈퍼위크의 투표 성향이 보여 준 바가 그렇다. 대의원과 권리당원만의 서울 경선에서는 이 지사가 52.4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반면 일반 국민과 일반 당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이 전 대표가 62.37%의 압도적 득표력을 발휘해 보였다. 이에 따라 누적 득표율에서 이 후보는 50.29%를 얻어 가까스로 본선 직행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후보가 0.30%를 덜 얻었다면, 반대로 이 전 대표를 비롯한 나머지 3명의 후보가 그만큼만 더 얻었다면 결선투표로 가게 될 것이었다.
대장동 여파 뒤늦게 덮쳐왔나
그게 아니라도 중도 사퇴한 정세균·김두관 두 후보의 표가 무효처리 되지 않고 계산에 포함되었더라면 이 후보의 누적 득표율은 49.32%에 그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2차 투표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 후보로서는 본선 직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제대로 한 셈이다.
2차 결선투표로 가더라도 그간의 표차로 미루어 이 후보의 승산이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닐 수도 있다. 표심 변화의 징후가 경선 막판 투표에서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야 대장동 여파가 표심에 가 닿은 것이다. 파급의 속도는 더뎠지만 그 강도는 엄청났다. 이 후보는 1차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51.41%, 2차 투표에서 58.17%의 득표율을 과시했으나 3차 때는 28.30%를 얻는데 그쳤다. ‘일반’에 속하는 투표자들의 지지열기가 급속히 퇴조한 결과다. 이런 분위기로 결선투표에 간다고 할 때 승패를 누가 쉽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이 후보의 본격적 위기 국면은 이제부터다. 국민들은 그의 궤변성 해명과 역공을 신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남다른 말재간에 혹해서, 그런가보다 했던 사람들도 갈수록 광범위하게 드러나는 대장동 의혹 사건 연루자들의 비리부패상에 아연실색이다. 개발지역 원주민들의 땅을 헐값으로 수용하고, 아파트 분양가를 약속보다 배나 높게 책정했다고 들린다. 덕분에 돈이 집중호우처럼 쏟아졌다. 그 돈을 주체 못해 50억원, 100억원 단위로 그냥 뿌렸다. 화천대유, 천화동인의 임원에게도 줬고 직원에게도 줬다. “뇌물 먹는 것 봤어”라는 사람 입막음에 120억원을, “청탁 대가로 준 20억원 내놔” 하는 사람 무마에 100억원을 썼다. 시의회 의장과 의원들에게도 수십억 원을 뿌렸다는 기사들이 지면을 도배하고 있다. ‘아수라’가 따로 없다.
그런데 당시 성남시장으로서 사업을 설계했노라고 스스로 자랑했던 이 후보가 지금은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동네머슴이 산적소굴에서 힘 닿는 대로 장물 대부분 뺏아 주민에게 돌려주었더니, 산적 떼가 변복하고 마을로 내려와 텐트 치고 농성하며 요란하게 주민을 선동한다.”
산적 분탕 칠 때 시장은 어디에
이런 절창(絶唱)이 또 있을까? 산적소굴이라면 자신의 측근이라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직무대행이 이끈 성남의뜰 말고 달리 또 있는가? 설계한 사람, 지휘한 사람, 밑천 안 들이고 천문학적 배당을 챙긴 사람, 그들이 고용한 고문·자문위원 외에 또 다른 산적이 있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긴말 할 필요 없이 산적들이 분탕 치며 돈을 강탈해갈 때 이 시장은 뭘 하고 있었는가? 화천대유 대주주인 김만배 씨가 천화동인1호 배당금 1208억원 가운데 절반은 ‘그분’ 것이라고 했다던데 그분은 어떤 분인가?
정권이 그 힘으로 이 후보의 아픈 다리를 들어줄 개연성이 높다. 그는 이미 권력의 핵심이 됐다. 공수처·검찰·경찰이 그를 직접 겨냥하는 수사는, 아마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믿고 더 큰소리를 치며 되레 경쟁상대측을 도둑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후보가 착각하는 게 있다. 정권의 힘은 예전 만 못하고, 국민의 힘(정당 이름이 아닌)은 훨씬 강해져 있다. 대장동 파랑(波浪)은 더 거세게 일 것이다. 이 후보와 민주당 골수 지지자들의 선택은 불변일지 모르지만 그 수는 전체 국민 중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이 전 대표 측이 경선불복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김 두 사람의 표를 무효처리한 데 대해 이의제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원팀’은 사실상 글러 버렸다. 이 전 대표 지지자들이 공공연히 ‘반 이재명’ 투쟁을 벌이지는 않더라도 민주당의 대선 전열이 흐트러질 것은 불문가지다.
국민의힘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경쟁구도가 되는 셈인데 이 호재를 잘 살려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거기도 집안싸움이 갈수록 거칠어져 국민들이 눈살 찌푸리게 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예뻐서 유권자들이 ‘정권교체’쪽에 무게를 실어주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후보끼리 경쟁이야 당연히 해야 하겠지만 품격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을 후보들이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안다고 다 행하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