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24화 술 핑계
“어떠세요. 석규를 아는데 도움이 될 거 같나요?”
이희수가 마지막 장을 넘기자 이철백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담배연기에 찔끔 눈물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이희수가 소설 간디를 읽는데 골몰하는 동안 이철백은 벌써 담배를 다섯 개비나 마음대로 빼서 피웠다. 이희수가 내놓은 담배였다. 이희수는 대답 대신 담배를 피워 물더니 한 동안 끽연에 몰두했다.
“음주수행이라는 그런 수행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윽고 이희수가 말문을 열었다.
“제가 볼 땐 그냥 알코올중독자에 불과하지 수행자로 보이지 않는군요.”
“그렇죠. 일반인이 볼 땐 알코올중독이죠. 수행자라 그러면 아마 기막혀 할 걸요.”
“그럼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은 음주수행자인가요?”
이희수의 질문에 이철백이 흐흐, 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자료를 보면….”
이희수가 책자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철백이 중간에 끼어들어 정정해 주었다.
“잠깐만요. 자료가 아니라 소설입니다.”
“예, 소설을 보면 시인은 정신질환자와 같이 독특한 경험을 가지지만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걸 작품이든 뭐든 형상화시키고, 반면 정신질환자는 독특한 경험에 함몰되어 현실과 초현실을 스스로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되어 있고….”
이희수가 책자에서 눈을 떼고 이철백을 쳐다보았다. 이철백이 맞는 말이라는 듯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수가 다시 책자를 뒤적였다.
“또 여기엔 이런 말도 있군요. 중독자는 몸의 생체리듬이 알코올에 맞춰져 있는 거라 일반인들처럼 희로애락 감정 때문에 음주하는 동기 따위가 있을 리 없고 항상 술에 절여 있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며 그러다보니 음주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무대포로 술 마시는 거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철백이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스스로를 객관화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알코올중독이냐 아니냐를 구분한다는 건데 사실 그건 술꾼들의 합리화일 뿐이에요. 객관화할 수 있다고 중독이 아닌 건 아니거든요. 다만 중증이냐 경증이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선생님은 음주수행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시군요.”
“저는 사실 궤변으로 봅니다. 아니 정정하죠.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말이라고 봅니다. 다시 한 번 물어보죠. 선생은 음주수행자입니까?”
이희수가 미간에 힘을 주며 이철백을 응시했다. 이철백이 눈싸움하듯 이희수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음주수행이란 건 소설적 표현이라고 봐요. 술꾼, 술고래, 술 귀신, 술 미치광이 이런 말보다는 도반,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그래요. 소설적 표현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런데 제가 소설에서 발견한 것은요.”
이희수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이철백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음주수행은 김석규 환자 본인의 희망사항이었다고 봐요. 소설에선 간디를 음주수행자로 설정했지만 도반이라고 칭한 거 보면 사실 환자 본인이 음주수행을 하고 싶었던 거죠. 달리 말하면 수행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술을 마시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까요. 전형적인 알코올중독증 환자입니다. 중독자들은 술 마실 수 있는 핑계라면 죽은 부모도 살릴 위인들이니까요.”
“그럼 저도 중독입니까?”
이철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희수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수는 순간 당혹해하는 이철백의 안색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석규는 지금 술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도 핑계일까요?”
이철백이 새로 담배 하나를 빼내어 불을 붙이고 질문했다.
“핑계가 진화했다고나 할까요. 다만 음주수행은 핑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주적개념은 환자 스스로 철저하게 믿고 있다는 거지요. 편집증의 일종인 피해망상에 과대망상이 뒤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편집증이라 그러면 의처증이나 의부증 같은 것만 있는 줄 아는데 김석규 환자처럼 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술을 국가와 사회의 주적이라는 망상으로까지 발달시킨 경우도 편집증으로 볼 수 있어요.”
변동원 사건 이후 김석규는 술을 사회의 악이요 주적이라 칭했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술이란 놈은 마셔서 없애야 한다고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시나브로 확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일상생활에서 김석규는 술과 관련한 것 말고는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주위사람들은 술에 대한 김석규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지 그걸 편집증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술을 수행도구로까지 삼을 정도로 아주 중하게 여기다가 갑자기 적으로 규정한 이유는 뭘까요?”
“아마 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뇌에 자극을 가해 술을 보복대상이나 원수로 상정하게 된 것 같군요. 보통 그런 경우엔 술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김석규 환자는 특이한 케이스긴 합니다.”
“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뭘까요?”
“환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 시켜왔거든요. 가령 술 마시고 실수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길 때 환자는 그걸 못 견뎌 하는 거죠. 왜 그런 실수를 했지 하며 고도로 피드백 시켰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생기고, 나아가 술에 대한 극도의 혐오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게 환자의 직업과도 무관하지 않은 게 보통 강력사건의 경우 음주가 개입되어 있잖아요.”
그렇다. 알코올은 공격성을 증가시키고 범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술을 마실 경우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 범죄 발생 위험이 약 9배가량 증가하기 때문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살인이나 폭력 등의 강력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평소보다 훨씬 높아진다. 2016년 경찰청에서 발간된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동안 검거된 살인범죄자 995명 중 범행 당시 주취 상태였던 이들은 390명으로 전체의 39.2%를 차지했다. 살인사건 10건 가운데 4건이 취중에 일어난 것이었다.
“아마 환자는 강력사건을 수사하면서 주취 범죄자에 대한 증오심을 상당히 가졌을 거고요. 그게 술에 대한 혐오로 자연스럽게 옮아갔을 가능성이 커 보여요.”
이희수의 설명에 이철백은 끊임없이 폭음과 단주를 반복하던 김석규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