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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35>] 닭 곱창에 소주


입력 2022.08.31 13:50 수정 2022.08.31 13:50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5화 닭 곱창에 소주


“낮술 좋아한다고 다 예술가는 아니고요. 예술가적 기질, 즉 반체제 성향이 있다는 거죠. 이게 이제 단순해지면 현실불만에 그치는 거고….”


한종탁이 염 부장의 얼굴을 흘낏 보고는 말을 멈췄다. 염 부장은 더 이상 한종탁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한종탁은 얼른 다른 화제를 찾아 헤맸다. 어쨌든 낮술은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막손 문 열었을까요?”


며칠 전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커피 한 잔 얻어 마시자며 들렀던, 염 부장의 고향친구가 운영한다는 선술집이 생각나 한종탁이 물었다. 그땐 퇴근시간에 가까웠는데도 조막손은 열려있지 않았다. 출입문에 선팅지로 발라놓은 메뉴들을 슥 훑어보았더니 소주에 닭 곱창, 동동주에 파전 등 전형적인 서민주점이었다.


“조막손은 왜?”


“저번에 가서 보니까 닭 곱창 한다고 써 붙여 놨데요. 그게 갑자기 생각나네요.”


“닭 곱창보다는 술이 생각나겠지.”


“칼칼하게 끓여놓으면 술맛 죽이거든요. 거기다 당면까지 넣으면, 쩝.”


한종탁이 입맛을 다시고는 잠시 추억을 더듬어 말했다. 고삼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서 친구들과 중앙시장으로 몰려갔었는데 그때 맛보았던 닭 곱창이 시나브로 이십대 시절의 메인안주가 되어있었더라는. 잦은 통음에 부대끼는 속을 풀어주면서 한편으론 술맛을 돋워주었던 스무 살 시절의 추억이 서린 닭 곱창.


퇴근시간까지 얼마간 여유가 있었으므로 염 부장 역시 시간도 죽일 겸해서 조막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조막손은 평상시보다 서너 시간 먼저 달려 나와 부리나케 가게 문을 열었다. 조막손은 알고 보니 염 부장의 초등학교 여자동창이었다.


한종탁은 앞서 밝힌 대로 지난밤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 소주 한 병, 점심에 막걸리 한 통을 먹었다. 자랑이 아니라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기어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만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종탁은 이 상황에서도 닭 곱창에 소주를 생각해 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한종탁은 군대에서 말술을 먹고도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니 흔들려서는 죽도 밥도 술도 안 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과 밥은 먹을거리가 아니라 단지 술을 꾸며주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


한종탁이 광주의 상무대에서 전차병 교육을 마치고 경기도 운천의 일기갑여단으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가자마자 혹한기 티시피시(TCPC) 훈련이었다. 전차포사격장이 있는 철원은 그해 수은주가 영하 삼십도까지 내려갔으니 그야말로 제대로 된 혹한기 훈련이었다. 병사들은 모포와 침낭에 몸을 파묻고 취침 점호를 마친 후 잠을 청했지만 커다란 군용천막 안은 공기마저 얼어붙어 있어 수면에 드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얼핏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한종탁은 침낭에 싸인 채로 벌떡 일어났다. 군기가 바짝 들어 지퍼도 열지 않고 강시처럼 일어나 앉으니 잠을 깨운 고참 병사가 낄낄거리며 지퍼를 열어주었다. 천막 한쪽 구석에서 붉게 삐져나온 불빛이 불현듯 동공을 흔들었다. 불빛은 둘러앉은 병사들 몇에 의해 엄호되고 있었는데 그 위에서 끓고 있는 라면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한종탁의 콧구멍에 짓쳐들었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고참병 하나가 반합뚜껑에 소주를 따라 한종탁에게 주었다. 고참병들의 회식 자리에 가장 신참인 한종탁이 영광스럽게도 발탁된 것이었다. 한종탁은 정좌한 채 반합을 받아든 다음 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다른 고참병이 술 잘 마신다며 기특하다고 한 뚜껑 더 따라주었다. 한종탁은 이번에도 반합에서 입을 떼지 않고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천막 안의 얼어붙어있던 공기가 어느덧 훈훈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제법 술에 취하는 것 같았지만 한종탁은 취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고참병들은 한종탁에게 취침 지시를 내릴 것이고, 그러면 이 감칠맛 나는 음주도 순식간에 물 건너갈 게 뻔했다. 한종탁은 취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질수록 더욱 신경을 써서 정좌 자세를 지탱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참병들은 돌부처 같은 한종탁에게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술을 따라주었다.


그때 이후로 한종탁은 술을 마시더라도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취하더라도 신경 써서 취한 티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만큼 시쳇말로 필름이 끊어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맨 정신인 것처럼 가장했다. 그건 한종탁이 변함없이 지켜온 음주에 대한 자세이자 마음가짐이었다. 그래서 염 부장 역시 한종탁이 그렇게 취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종탁은 조막손에 들어서서 우선 닭 곱창에 소주를 주문하고 실내를 훑어보았다. 나무와 한지가 어우러진 옛 주막풍의 인테리어가 그윽하게 다가왔다. 정감 있는 황토 흙으로 마감한 벽엔 창호문짝이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가래, 도리깨 등 농구도 몇 점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유려한 붓글씨로 한시를 적은 한지 몇 장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지에 휘감기듯 써내려간 이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꽃 사이 놓인 한 동이 술을 / 친한 이 없이 혼자 마시네 /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구나 / 달은 전부터 술 마실 줄을 모르고 / 그림자는 부질없이 흉내만 내는구나 / 한동안 달과 그림자 벗하니 / 즐거움이 모름지기 봄날과도 같다 / 내가 노래하니 달은 거닐고 /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 어지러워 / 깨어서는 모두 같이 기쁨을 나누고 /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 길이 영원한 정을 저들과 맺어 /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길….


조막손이 닭 곱창과 소주를 가져오자 한종탁은 합석을 권했고 조막손은 맥주 두 병을 가져와 자리에 턱하니 앉았다. 염 부장과 조막손은 맥주를, 한종탁은 소주를 잔에 채우고 건배를 제의했다. 염 부장과 조막손이 맥주 한잔으로 안부를 묻는 동안 한종탁은 소주 서너 잔을 거푸 마시고 일방적인 취중언설에 들어갔다. 이백의 시를 보니 술맛이 한결 더 난다며 언죽번죽 둘러대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육십 대에 접어든 조막손이 건강 걱정을 털어 놓자 한종탁은 오지랖 넓게도 이반 일리치(1926~2002)까지 언급했다.


병원이 병을 만드니 병원에 자주 가지 마세요. 의사는 병 아닌 것도 병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졌어요.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잖아요. 병도 진짜 병이면 그나마 봐주겠는데 병 아닌 것을 병이라 그러거든요. 잘못 아는 것도 어쨌든 아는 것은 아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병 고친다고 병원에 가지 마세요. 대다수의 병원은 진단을 하는 곳이지 치료를 하는 곳이 아니에요. 내 몸의 상태가 어떤지, 건강한지 나쁜지 가늠해 주는 곳이에요. 그럼 치료는요? 스스로 하는 겁니다. 어떻게 치료 하냐고요? 생활습관, 식습관, 그리고 주위환경을 바꿔야죠. 절대 명심할 건 병원치료는 주가 아니라 보조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몸을 의사에게 일임하지 마세요.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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