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시절, 죽은 사람 집서 사진 훔쳐"

윤경원 기자

입력 2008.07.09 13:36  수정

<대변인에게 듣는다①-박선영>MBC 기자→교수→선진당 의원

"새벽 3시에 전화, 대변인 생활 애환…먹거리 문제엔 이념없어"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보수정권이라고 해서 잘못하는 것을 다 눈감을 순 없다. 아이를 키워도 잘못한 것은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고 말했다.

18대 총선일인 지난 4월 9일 밤. 한 TV방송 프로그램에서 각 당의 대변인격 인사들이 출연, 총선 결과를 평가하는 토론이 이뤄졌다. 언론지상에 많이 등장하던 인사들이 즐비한 가운데 낯선 여성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절제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 거기에다 명확한 발음에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까지. 해당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가 누구냐’는 물음표가 쇄도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52)의 첫 당직 활동은 그렇게 당선 확정 직후부터 시작됐다. 동국대 법학교수로서 수십년간 학자의 길을 걸어온 그가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돌연 맡게 된 대변인직은 어쩌면 천성적이듯 하다. 학계에 있기 전 12년 동안 MBC보도국 기자 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기사를 쓰고 마이크를 잡아왔던 터.

초선의원인 그가 쇠고기 정국 한가운데에서 치러내고 있는 선진당의 ‘입’역할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무난한편. 자극적인 문구나 돌출발언도, 흥분하는 일도 없다.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 전후엔 항상 ‘안녕하십니까, 자유선진당 대변인 박선영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아 기자들 사이에선 ‘깍듯 선영’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대여 공격수로서의 ‘필요 악’격인 인상적인 표현도 필요하지 않느냐는 분석도 있다.

하루에도 3~4건의 논평을 쏟아내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는 박 대변인을 <데일리안>이 칠석일인 7일 오후 그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그는 논평이 출력된 프린트 용지를 들고 최종 수정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많이 바쁜 것 같다. 하루일과는 어떻게 되나.

“전화로 시작해서 전화로 끝난다. 제일 이른 시간엔 새벽 3시에도 전화를 받아봤고 보통 아침 7시 전부터 (기자들로부터)전화가 오기 시작해 7시~7시 30분 사이에 전화가 제일 많이 온다. 밤 12시 넘게 오는 전화도 있다. 하루 평균 100통에서 150통 정도 받는다.”

“요즘 기자들을 보면 굉장히 부럽다. 우선 계엄사령부에 가서 ‘죽죽 긋는’ 검열이 없다. 또 여기자 분들이 참 많아지신 것 같아 보기가 굉장히 좋더라.
-대변인을 4개월여 맡고 있는데 그 역할이 어떤가.

“바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임무가 막중하더라. 내 개인적 생각이나 정치적 관념을 투영시키기 보다는 당 입장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언론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대변인이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대변인 역할의 어려운 점과 좋은 점을 꼽는다면.

“옛날보다 매체가 많이 늘어났다. 나 때는 인터넷 매체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지방지도 많지 않았다. 그 많은 매체들이 각각 특성이 있다. 예를 들면 인터넷 매체는 시시각각 업데이트 돼야 하고 지방언론은 지방의 특성이 반영돼야 한다. 그러다보니 취재경쟁이 높아져서 새벽 3시에도 (기자들로부터) 전화가 올 때, 또 나도 모르는 사안을 기자들이 먼저 알고 있을 때가 있어 당혹스럽더라.

좋은 점은, 글쎄... 언론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인데, 그게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 모르겠다. 기자생활 할 때 늘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신문을 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0시 뉴스를 보고 잠 들곤 했었는데 또다시 15년 만에 그 생활을 하게 됐다. 때때로 감회가 새롭다.”

-대변인 활동을 하면서 당과 개인적 생각이 다를 때는 어떻게 조정하는가.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대변인 활동 시기 대부분이 쇠고기 정국이었는데 아직까지 당과 다른 점은 없었다. 단지 ‘너희도 반미냐’, ‘진보로 돌아섰냐’, ‘보수가 아니다’ 이런 말씀들을 하셨을 때 괴로웠을 뿐이었다.”

-법학자의 길을 걷고 계시다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계기가 없었다. 제의를 받은 것이다. 이회창 총재 측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죄송하지만 학기중이라 힘들 것 같다. 준비가 안 될 것 같다’고 거절을 하다가 갑자기 하게 됐다. (비례대표 후보자 등록) 마감을 며칠 안 남겨두고 신청하게 됐고, 당선되자마자 나도 모르게 대변인 역할을 하게 됐다.”

-MBC기자 생활을 중단하고 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내가 기자생활을 할 때는 굉장히 불행한 시기였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7년에 시작했는데, 국가 긴급조치 등이 나올 때였다. 대학 4년 동안 1학기라도 제대로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휴교사태가 빈번했다. 그렇게 대학시절을 보내고 언론사에 들어갔는데 3여년 후에는 10.26, 5.18이 터졌고 그러면서 나는 과연 이 땅에 민주주의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내 전공이 법학인데, 이 땅에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있는지 자괴감이 많이 들었고 속상했다. 그때는 기자들이 자괴감과 울분, 분노 때문에 술을 참 많이 먹었다. 10.26부터 5.18직후까지는 모든 기자들이 자신이 쓴 기사를 들고 시청 부근에 있는 계엄사에 가서 검열을 받았다. 중위, 대위들이 내 기사에 빨간색 펜으로 죽죽 그었다.

그땐 정말 내가 기자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내가 어떻게 취재했고, 이 내용이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 사건이고, 국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지에 대한 관념 없이 군인 입장에서 죽죽 긋는 것만 보고 서글펐다. 그래서 기자생활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의아심, 또 내 자신에 대한 정체성까지 의심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보냈다.

그러다가 1983년도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1년동안 국비장학생으로 1년 간 유학을 하게 됐다. 국내의 어려운 취재환경에서 벗어나 공부하는 게 좋았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혼란과 분노, 아쉬움을 체계화 시키고 이론화 시켜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귀국해 돌아와 곧바로 다시 독일로 가서 공부를 더 했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사표를 냈다.

법학을 전공했는데, 당시 법대 여교수는 이대, 숙대를 빼놓고는 외국어대학 한 군데 밖에 없었다. 법학이 보수적인데다 남성위주의 학문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예쁘게 봐주셔서 자리를 잡았고 동국대에서 교수를 하게 됐다.”

"상임위, 어디로 결정되건 간에 기자를 했던 사람으로서 열심히 할 생각이다."

-그때와 지금의 언론환경을 비교해본다면.

“요즘 기자들을 보면 굉장히 부럽다. 우선 계엄사령부에 가서 ‘죽죽 긋는’ 검열이 없다. 또 여기자 분들이 참 많아지신 것 같아 보기가 굉장히 좋더라. 나 때는 사회부 여기자는 눈을 씻고 보더라도 없었다. 회사에 들어가 전화를 받으면 처음부터 반말로 ‘너 말고 남자기자 바꿔’라는 말을 숱하게 들으며 살았다. 취재 환경도 많이 좋아졌고 매체 간 차별 없이 역량껏 취재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국회 상임위는 어디를 희망하는가.

“초선이고, 비례대표다 보니 순위에서 밀린다. 일단 1, 2, 3위까지 희망 상임위를 써내기는 했다. 1지망은 교수생활을 했으니 교육과학기술위, 2지망은 기자생활을 했으니 문화관광위, 3지망은 보건복지부를 희망했다. 복지부는 기자생활 할 때 출입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결정되건 간에 기자를 했던 사람으로서 열심히 할 생각이다.”

-앞으로 어떤 법안을 발의할 생각인가.

“국회법 개정안(교섭단체 구성 기준 완화를 내용으로 함)을 발의중에 있고,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도 우리 의원실에서 주축이 돼서 했다. 내주 월요일에는 로스쿨법안 개정작업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것 외에도 초미의 관심사인 광우병을 예방하는 내용을 담은 ‘광우병 예방과 대책에 관한 법률’을 거의 다 만들었다. 또 낙태를 줄이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법안도 만들어 놓고 있다.”

"아직까지 당과 다른 점은 없었다. 단지 ‘너희도 반미냐’, ‘진보로 돌아섰냐’, ‘보수가 아니다’ 이런 말씀들을 하셨을 때 괴로웠을 뿐이었다."
-창조한국당과 교섭단체 구성을 위한 공조가 파기되고 있는 분위기다. 국회법 개정안 발의가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고 있는데….

“창조한국당과는 아직 협의중이며, 국회법 개정은 이것과는 관계가 없다. 나는 전공이 헌법인데, 그간 강의 시간에 상임위원회 운영이라든지 교섭단체 구성에 대해 많이 강의했다. 그러면서 교섭단체 수가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정했다는 지적을 했다. 최소한 교섭단체 구성 기준이 10명 정도는 돼야 신생정당이 출현할 수 있고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강의했었다.

국회에 와서 보니 10명은 적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상임위(총 17개)에는 1명씩은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15명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비교법적으로 봐도 우리보다 면적이나 인구수가 많은 나라도 교섭단체 구성 기준이 15정도다. 현실적으로 진입장벽을 맞추자고 한 것이지 창조한국당과는 관계없다.”

-이번 ‘촛불 정국’에서 보수정당인 선진당이 대정부 비판에 전면에 서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보수진영으로부터 정체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나만 보시고 둘은 안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정권이라고 해서 잘못하는 것을 다 눈감을 순 없다. 아이를 키워도 잘못한 것은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 예쁘다고 잘한다, 잘한다 하면 버릇 없어진다. 쇠고기 문제는 지금은 성격이 변질된 양상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먹을거리 문제다.

먹을거리에 이념이 들어갈 수 있나. 보수적인 진보적인 먹거리가 따로 있지 않다. 그것은 시각이 잘못된 사람의 발언이다. 1차적 책임은 정부가 초보자도 안 할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 협상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국민에게 혼란과 의혹을 키운 것이다. 정부의 잘못은 아무리 지적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자생활 할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꼽는다면.

“80년대 초반 에이즈에 대해서 불안감을 갖게 된 시점이었을 때다. 수혈 과정에서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 자살한 사건이었는데, 내가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인터뷰를 했었다. 그때 그 분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친척, 동네사람들이 자신을 마치 나쁜 짓 한 사람 마냥 매도하고 남편도 볼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 그때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또 제대로 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을 때 애매한 사람이 매장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 분의 자살 소식을 듣고 몇 달을 마음을 못 잡았다.

두 번째는, 용서 청할게 있는데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당시 기자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경찰서와 병원을 도는 일이다. 늦가을부터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이 하루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불행한 시절이었다. 일단 사고가 나면 그(고인의) 집에 가서 사진을 가져와야 한다.

방송은 사진을 보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못할 짓이었다. 집은 엉망이고 슬픔에 잠겨 있는데 뒤져서 사진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땐 지금처럼 디카도 없고 사진도 귀한시절이었다. 취재윤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것을 몇 번이고 하면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고, 아픔을 위로해주지 못할망정 집을 뒤져 사진을 찾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가정생활이 궁금하다.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 가정생활에 소홀해지지는 않는가.

“남편은 한 분이고(웃음), 아들은 둘이다. 사실 교수생활 할 때도 집에 일찍 안 들어갔고 늦게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성격이 뭐를 하면 끝장을 보도록 열심히 하는 ‘나쁜 성격’이고, 책도 5권이나 냈고 논문도 많이 쓰다보니 토요일, 일요일이 사실 없었다. 또 야간 대학도 맡아서 운영하다보니 밤에 늦게 들어가곤 했었다. 그런 것이 정치 생활 하면서 그대로 이어진다. 때문에 식구들이 특별한 불만은 없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면 야단을 치고 항상 몇 대를 맞겠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곤 종아리를 본인이 원하는 만큼 때렸다."

-가정교육의 원칙은 무엇인가.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참 엄하게 키웠다. 시간 안 지키는것, 거짓말 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면 야단을 치고 항상 몇 대를 맞겠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곤 종아리를 본인이 원하는 만큼 때렸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것이 한 번도 입학식과 소풍 같은 데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 점은 지금 생각해도 미미안하다. 그래도 반듯하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좋아하는 연예인과 노래가 있다면 말해 달라.

“내가 얼굴에 살이 없어서 그런지 얼굴에 살이 있으면서도 차분한 이영애 씨를 좋아한다. 노래는 심수봉 씨의 노래를 좋아한다.”

-곧 있으면 베이징 올림픽이 시작된다. 우리나라 대표선수들한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올림픽에 대한 열기가 식었는지 선수촌에 찾아오는 사람도 줄었다고 한다. 이번 주에 이회창 총재님을 모시고 가보려고 하는데, 선수들은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정말 페어플레이 하고 참여하는데 큰 의미를 갖고 열심히 싸워주시길 바란다.”

-끝으로 <데일리안>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늘 저희 정당에 관심 가져주시고 성원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정당 출범한지 5개월째이다. 아직 뿌리도 채 공고하게 내리지 못한 정당이지만 원칙과 철학 갖고 국민 곁에서 국민 소리 듣고자 하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주시고, 잘못한 것도 따끔 지적 해주고 또 지적만큼 격려도 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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