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애니메이션이 해외 영화제와 플랫폼에서 주목받으며 K-콘텐츠의 다음 주자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거대 자본이 아닌,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는 좁은 길 위에서 치열하게 실험해 온 소수 창작자들의 끈질긴 도전이 밑바탕이 됐다.
올해 서울인디애니페스트를 빛낸 신예 최지희 감독과 스튜디오 요나를 이끄는 박재범 감독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업화의 문법을 거부하며 한국 독립 애니의 고민과 새로운 가능성을 동시에 증명하고 있다.
◆ "영화제는 창작자를 드러내지만, 유튜브는 작품이 전면에 선다"
올해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 주목받은 인물은 최지희 감독이었다. 그는 폐허 직전의 도시 속 노파와 버려진 아기가 함께 생존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 '후잉'으로 독립보행·새벽비행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인디의 별'을 거머쥐었다. 앞서 애니메이션 '시청률의 여왕'으로 2021년 랜선비행상에 이어 또다시 수상의 기쁨을 안으며, 독립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젋은 피로 떠올랐다.
수상 소감을 묻자, 그는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떨린다. 상영할 기회만으로도 감사한데 상까지 주셔서 행복하다"며 벅찬 심경을 전했다.
최 감독이 '후잉'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닿아있었다. 그는 조카의 탄생 무렵 한국 사회의 저출생과 고령화, 나아가 지역 소멸이라는 화두를 마주하며 이 주제를 다루게 됐다고 했다.
최 감독은 이처럼 무거운 주제를 담은 독립 애니메이션이 '영화제'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 '일상'으로 침투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모색 중이다. 그는 '시청률의 여왕', '한 점의 감성'을 포함한 웹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며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그는 "영화제 상영이 창작자 자신을 함께 드러내야 하는 장이라면, 유튜브는 작품만이 전면에 나서는 무대라는 점에서 차이를 느낀다. 두 경험이 주는 의미가 다르다"고 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그는 "단편 중심에서 중편으로도 확장해 보고 싶다. IP를 기반으로 한 연재물처럼, 웹툰이 확장되듯 애니메이션도 시리즈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에 도전해 보고 싶다"며 독립 창작자의 성장 비전을 밝혔다.
◆ '두려움'이 동력이 되는 아날로그의 집착
최지희 감독이 독립 애니메이션계젊은 피로 떠올랐다면, 박재범 감독은 스튜디오를 거점으로 독립 애니메이션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다. 그는 현재 스튜디오 요나를 이끌며, 기획부터 제작·완성까지 전 과정을 내부에서 소화하는 체제를 지향한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으로 대종상 '대종이 주목한 시선상'과 인디애니페스트 '미리내의 별'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 받아왔다.
그는 독립 애니메이션의 본질을 "감독이 자기 개성과 세계관을 가장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정의한다. 상업 애니메이션의 문법에서 벗어나 독특한 표현과 스토리를 담아낼 수 있으며, 동시에 산업의 밑거름이 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박 감독의 창작 원동력은 '죽음처럼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선택한 스톱모션 방식과도 연결된다. 그는 직접 인형을 만들고 한 프레임씩 촬영하는 아날로그적 제작 방식을 고수하며 "천이 바다가 되고, 일상적 물성이 다른 의미로 변주되는 과정에서 애니메이션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설명했다.
스튜디오 요나는 소규모 체제 속에서도 "한국에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제작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끈질긴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박 감독은 이러한 예술적 고집과 실험 정신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에 가로막혀 있음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는 "투자자 입장에서 회수 가능성이 낮아 큰 제작비를 끌어오기 어렵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외하면 손익분기점을 넘은 장편이 드물다"고 토로했다.
◆ '개성과 뾰족함'으로 국경 넘어야
박재범 감독은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짚으며, 그 해법으로 두 감독이 보여준 '실험'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진단하며 아직 한국 애니메이션계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바라봤다.
다만 박 감독은 "작품들이 더 개성 있고 뾰족해야 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는 매체이기 때문에 더 인터내셔널해야 한다“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최지희 감독이 유튜브와 IP 확장을 통해 '대중 접점 확대'를 모색하고, 박재범 감독이 스톱모션이라는 '콘텐츠 차별화'를 고수하는 이들의 실험과 비전은 더 발전할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미래를 꿈꾸게 만든다.
박 감독은 “이미 여러 곳에서 꿈틀거림이 감지되고 있고, 머지않아 관객에게 큰 선물이 될 작품들이 나올 것이다"이라며 독립 창작자들이 만들어갈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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