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지, 윤심덕 역으로 첫 연극 도전
윤대성 희곡 원작 재창작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암담했고 유입되는 근대 사상은 자유를 속삭였다. 억압된 시대 속에서 예술과 자유를 갈망하던 청춘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부유했다. 연극 ‘사의 찬미’는 조국 상실의 시대적 암흑기 속에서 ‘온전한 나’로 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내면을 건조하고도 묵직하게 무대 위에 구현한다.
ⓒ쇼앤텔플레이, 위즈덤엔터테인먼트
작품은 1990년 5월 극단 실험극장의 30주년 기념작으로, 윤대성 희곡 원작을 기반으로 재창작돼 지난해 초연했고, 올해 재연으로 관객을 만났다. 1926년 관부연락선 덕수환에서 현해탄으로 투신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천재 극작가 김우진의 비극적 생애를 다룬다. 연극은 미스터리나 치정극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치중하지 않고 인물들의 시대적 고뇌와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비추는데 집중한다.
초연이 사랑과 정서를 중심으로 인물을 따라갔다면, 재연은 원작 희곡이 가진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선택의 과정’과 ‘인물의 주체성’에 더 집중한다. 특히 윤심덕은 비극에 떠밀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관계를 스스로 선택하는 인물로 재구성되고, 나혜석 역시 윤심덕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시점에서 질문을 던지며 서사를 이끄는 화자로 자리한다.
이번 시즌에 윤심덕으로 새롭게 합류한 서예지는 주체적이고 당당한 신여성의 모습 이면에 자리한 예술가로서의 불안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화려한 수식어를 덜어낸 건조한 대사 처리와 절제된 몸짓은 사회적 잣대에 부딪혀 꺾여가는 인물의 비극성을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냈다. 현실의 장벽 앞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눈빛과 호흡만으로 객석에 전달했다.
김우진 역의 박은석은 지식인이 겪는 무력감과 창작을 향한 열망 사이의 분열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보수적인 가문의 종손으로서 짊어진 책임감과 자유로운 예술적 자아 사이에서 붕괴해 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었다. 두 배우의 앙상블은 낭만적인 연인을 넘어, 철저한 절망 속에서 서로를 유일한 이해자이자 도피처로 인식해 가는 동지적 관계를 무리 없이 완성했다.
장식을 최소화한 무채색 중심의 무대는 인물들이 처한 억압적인 현실을 상징했다. 세트의 전환을 줄인 대신 상징적인 오브제와 조명의 대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좁고 단절된 느낌을 주는 공간감은 극 중 인물들이 느끼는 숨 막히는 현실을 대변했다. 투신을 앞둔 바다를 표현하는 푸른빛의 조명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과 완전한 해방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를 동시에 담아냈다. 음향 역시 과도한 감정 몰입을 유도하기보다, 배우들의 육성과 대화 사이의 여백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극의 사실성을 높였다.
연극 ‘사의 찬미’는 죽음을 미화하거나 단순한 비극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들의 투신이 시대의 폭력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자, 억압을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주체적인 선택이었음을 서술한다. 수식어를 배제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는 1920년대 청춘들의 실존적 고뇌를 성공적으로 재현하며,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당신은 온전한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강렬한 물음을 남긴다.
이 묵직한 여운은 무대를 옮겨 계속 이어진다. 서울 공연의 성공적인 마무리에 이어 연극 ‘사의 찬미’는 당장 3월 6일과 7일 논산아트센터를 시작으로 김해 등 전국 투어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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