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아트센터 시즌제 '콤파스' 2000년 첫 시작...'취향 설계자' 입지 굳건
국립극장·세종문화회관 등도 줄줄이 시즌 패키지 티켓 도입
"현재는 구독, 패키지 융합 사용...충성 고객 모으고, 극장 안정성도 확보"
정보 과잉의 시대, 수많은 영상 플랫폼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 속에서 현대인은 늘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하루에도 수십 편의 개막 소식이 전해지는 공연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정보 범람은 관객에게 심리적 장벽과 ‘선택 피로’를 유발한다. 이에 극장들은 개별 공연 티켓을 단순 판매하던 공간 대관 중심 운영 방식에서 탈피하고, 극장의 안목으로 엄선한 1년 치 라인업 전체를 제안하는 ‘큐레이션’(Curation)을 경쟁력으로 내세웠다. 공연장이 물리적 장소를 넘어, 관객 라이프스타일을 설계하는 ‘취향 브랜드’로 진화한 것이다.
ⓒLG아트센터
극장 주도의 라인업 큐레이션과 시즌 패키지는 해외 공연계에서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유럽 오페라극장 등 세계적 복합문화공간과 예술 단체들은 일찌감치 시즌별 라인업을 미리 발표하고 구독 모델을 정착시켰다. 이들이 큐레이션을 선제적으로 도입한 근본적인 이유는 ‘재무적 안정성 확보’와 ‘예술적 실험’의 양립에 있다. 연초에 시즌 패키지를 판매해 1년 치 운영과 신작 제작에 필요한 막대한 초기 자본을 확보하고, 대중성이 확실한 흥행작과 낯설고 실험적인 현대 예술을 한데 묶어 관객에게 제안함으로써 예술적 다양성을 보호해 온 것이다.
해외 유수의 극장들이 증명한 이 선진적인 큐레이션 시스템을 국내 공연계에 최초로 도입하고 안착시킨 곳이 LG아트센터다. LG아트센터는 2000년 역삼동 개관과 동시에 국내 최초로 1년 치 기획공연 라인업을 미리 공개하고 이를 묶어 파는 시즌제 ‘콤파스’(CoMPAS)를 도입했다. 당시 대관 수익에 의존하던 국내 공연장 생태계에서는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시도였다.
2022년 마곡으로 극장을 이전한 이후로도 관객의 세밀해진 취향을 반영해 더 고도화된 큐레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극장 큐레이션 파워는 라인업에서부터 드러난다. 지난해 ‘콤파스 25’ 패키지에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알렉산더 에크만의 ‘해머’, 연극 ‘헤다 가블러’, 양손프로젝트 신작 ‘유령들’,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 영국 로열 발레 ‘더 퍼스트 갈라’ 등 세계적 수준의 인기 공연들이 다수 포진해 관객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올해 발표된 ‘콤파스 26’ 역시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라인업을 제안하며 ‘취향 설계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측은 “개관 후부터 세계 최고의 작품을 시차 없이 소개한다는 기조 아래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며 “큐레이션을 통해 세계적인 거장들이나 신예 예술가들, 잠재력을 가진 국내 아티스트 그리고 해외 진출 가능성이 있는 국내 작품들까지 다양한 무대를 편견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2010년대, 공공 극장들 역시 LG아트센터에 이어 줄줄이 시즌 패키지 티켓을 도입했다. 국립극장은 2012년 공공극장 최초로 1년 단위의 ‘레퍼토리 시즌’을 통해 전통 예술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신작과 우수 레퍼토리를 체계적으로 묶어 발표했다. 도입 초기에는 전통 예술의 시즌제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으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트로이의 여인들’ 등 누적 관객 수만 명을 동원하는 메가 히트작을 탄생시키며 고정 지지층을 다졌다.
세종문화회관도 2016년, 개관 이래 처음으로 ‘세종시즌’을 도입했다. 특히 세종문화회관은 2024년 국내 극장 중 ‘패키지 티켓’을 ‘구독’ 시스템으로 처음 전환한 사례이기도 하다. 세종시즌 전 공연을 40% 할인해 주고, 선예매 혜택 등을 제공하는 서비스다. 지난해에는 1인 2매까지 예매 가능한 구독 플러스를 추가해 선보이며 큰 호응을 얻었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보수적인 공공 극장의 이미지를 벗고 라인업뿐만 아니라 극장의 공간 경험 자체를 큐레이션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세종문화회관은 로비에 성수동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팝업 스토어 형태의 식음료 부스를 유치하고, 감각적인 시각물을 배치해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처럼 극장이 큐레이션을 관객에게 판매하고 제안하는 방식은 산업의 성숙과 함께 본질적인 진화를 거듭해 왔다. 초기에는 여러 기획 공연을 묶어 높은 할인율을 제공하는 ‘시즌 패키지’ 형태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 그 자체를 판매하는 ‘구독’ 모델로 그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두 제도는 관객이 목돈을 선지불하고 할인을 받는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비즈니스의 뼈대와 관객의 소비 심리에 있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패키지가 극장 입장에서 1년 치 객석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선도 거래이자 관객의 ‘가성비와 목적성’에 기반한 소비라면, 구독은 극장의 공간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판매하는 것이다.
한 공연 관계자는 “구독료를 지불한 관객은 단순히 여러 장의 티켓을 산 것이 아니라 ‘나는 이 극장이 추구하는 예술적 철학을 지지하는 구독자’라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면서 “극장과 관객의 관계가 일회성 판매자와 소비자를 넘어, 일상을 공유하는 단단한 팬덤으로 격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거 극장이 창작자에게 무대를 빌려주는 수동적 ‘하드웨어’였다면, 오늘날의 극장은 관객의 예술적 취향을 제안하고 공간의 경험을 설계하는 주체적인 ‘소프트웨어’이자 ‘브랜드’”라며 “현재의 극장 구독제도를 통해 충성 고객을 모으고, 동시에 패키지를 통해 비인기 장르 혹은 신진 창작자의 무대를 영리하게 채우면서 두 모델을 전략적으로 융합해 사용하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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