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저마다의 역할 있어”…출판사 혜화1117가 쌓아나가는 의미 [출판사 인사이드㉘]

장수정 기자 (jsj8580@dailian.co.kr)

입력 2026.04.01 08:11  수정 2026.04.01 09:15

“스스로 어떤 의미 부여하며 시작한 것 아냐…

만들어나가는 책으로 의미를 쌓아가면 좋겠다.”

<출판 시장은 위기지만, 출판사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오랜 출판사들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며 시장을 지탱 중이고, 1인 출판이 활발해져 늘어난 작은 출판사들은 다양성을 무기로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다만 일부 출판사가 공급을 책임지던 전보다는, 출판사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개합니다. 대형 출판사부터 눈에 띄는 작은 출판사까지. 책 뒤, 출판사의 역사와 철학을 알면 책을 더 잘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저자와 함께 만드는 혜화1117의 책


2017년 한옥에 자리를 잡으며 시작된 출판사 혜화1117은 편집자로 오래 일하던 이현화 대표가 운영하는 1인 출판사다. 1936년 지어진 오래된 한옥에 반한 이 대표가 이 집의 이름을 따 설립했다. 당초 책방을 운영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지만, 혜화1117의 공간적 특성을 고려해 집에서 책을 제작해 선보이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연한 만남을 통해 시작한 출판사지만, 차근차근 의미를 쌓아나가고 있다. 혜화1117은 혜화에 위치한 한옥 주소의 숫자다. 이 대표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혜화1117이 쌓아나가는 책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 이에 대해 “출판사 이름에 어떤 의미도 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멋있는 이름, 의미 있는 이름들이 많은데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시작한 것이 아닌, 만들어나가는 책으로 의미를 쌓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혜화1117이 꾸준히 책을 만들어가면, 혜화1117이라는 이름이 그 성격을 드러내는 고유한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얼핏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혜화1117은 인문교양, 문화예술 분야의 책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단순히 ‘어떤’ 책을 선보이겠다는 목표보다는 국내 저자들과 ‘함께’ 책을 만들어 가는데 방점을 찍고 있다. 어떠한 기준에 따라 책을 직접 고르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닌, 기획 단계에서부터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드는 방식을 추구한다.


2018년 출간된 혜화1117의 첫 책 로버트 파우저의 ‘외국어 전파담’을 비롯해 최열의 ‘옛 그림으로 본 서울’, ‘옛 그림으로 본 제주’, ‘옛 그림으로 본 조선’ 시리즈가 사랑을 받으며 혜화1117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 대표는 1000만원이라는 크지 않은 돈을 들고 시작한 출판사지만, 첫 책부터 관심을 받으며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었고, 코로나19로 힘든 시기 ‘옛 그림으로 본’ 시리즈가 호평을 받으며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옛 그림으로 본 서울’ 이후 ‘옛 그림으로 본 제주’, ‘옛 그림으로 본 조선’을 비롯한 연속 기획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나온 후속권들이 앞의 책을 또 팔리게 해주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며 “요즘처럼 책들의 생애주기가 짧아진 때, 이렇게 연결된 책들이 꾸준히 판매가 되고 있어 출판사 운영에 큰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과정을 원동력 삼아 경성, 도시, 언어, 옛 그림, 조선시대 기록화, 4.3, 동네책방 등을 주요 키워드 삼아 혜화1117만의 책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저자로부터 시작된 연결점을 따라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있다”는 이 대표의 소신처럼, 혜화1117은 10여 년의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또 확장하고 있었다.


◆ 독자·동료와의 느슨하지만 탄탄한 연대


독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를 바랐다. 이 대표는 ‘독자들에게 어떤 책을 선보일까’가 아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가’를 생각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저자 선생님들이, 편집자이자 출판사인 제가, 세상을 향해 또는 독자분들께 건네고 싶은 바가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 잘 전달하고, 호기심을 느껴서 발견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한다”고 말한 그는 “책이 많이 나가는 것도 좋지만, 꼭 모든 책이 다 잘 나가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하고 있다. 책마다의 역할이 따로 있고, 그 역할에 맞는 시장의 크기가 있다. 숫자로 모든 걸 다 말할 수 없는 세계도 물론 존재한다. 우리 책을 보는 독자분들께 책의 지도를 그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동료들과 함께 걸으며 전과는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대표는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여성 대표 모임 ‘출판하는 언니들’을 통해 동료 출판인들과 함께 책을 만들고, 또 도서전에 참여하고 있다.


이 모임 역시 처음엔 어떠한 목적이나 목표가 없었다. “그냥 걷자는 마음이었다”고 모임의 이유를 말한 이 대표는 “그렇게 걷다 보니 이야기가 이어져서 함께 서울국제도서전에 나가기도 하고, 함께 책을 만들기도 하고, 전국을 다니고도 있. 거꾸로 어떤 목적을 두고 시작했다면 이렇게 평화롭고 즐겁게 함께 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도 한다. 각자 느슨한 연대를 지향하면서 여전히 함께 모여 걷고, 함께 기획해서 책도 만들고, 그 책을 알리면서 각자의 출판사를 알리고 있다. 우선은 다가오는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 세 번째로 연합부스를 꾸려 참가한다. 이곳에서 각자 출판사에서 펴낸 자체 ‘여름 첫 책’을 함께 홍보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혜화1117과 이 대표의 소신이기도 했다. 그는 “그 뒤로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앞서서 모색하기보다는, 꾸준히 함께 걷는 것을 제1의 본령으로 두고 있다. 그렇게 걷다보면 또 새로운 길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함께 하기 시작했던 2023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올해도 다양한 책을 통해 ‘걷기’를 계속한다. 최근 출간한 제주 4.3에 대해 다룬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 ‘4.3, 아카이브로 본 역사’를 시작으로, 출판평론가 한미화의 ‘동네책방 지속탐구’, ‘유럽 책방 문화 탐구’를 통해 아름다운 책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열, 홍지석의 ‘한국민중미술사’와 로버트 파우저의 ‘문자 전파담’ 등 혜화1117의 버팀목이 돼 준 작가들의 귀환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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