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르 카시야스는 첫 경기부터 무려 5실점을 허용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SBS 동영상 캡처)
세계 최고 수문장으로 꼽히던 스페인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33)에게는 축구 인생에 남을 굴욕의 하루였다.
카시야스는 14일(한국시간) 브라질 살바도르 아레나 프론테 노바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B조 1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수비 붕괴와 개인 실수까지 겹쳐 무려 5골을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스페인은 사비 알론소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고 1-5로 참패했다. 한 경기 5골은 카시야스의 A매치 최다 실점 기록이기도 하다.
카시야스는 지난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전 포르투갈전을 시작으로 네덜란드와 결승전까지 단 한 골도 내주지 않으며 433분간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이번 월드컵에서 1경기만 더 클린시트를 기록하면 왈테르 젱가의 517분 무실점 기록 경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 이어 4년 만에 재회한 네덜란드전은 카시야스에게 악몽이었다. 전반 로빈 판 페르시의 다이빙 헤딩 동점골을 손도 못써보고 허용하며 대기록 도전이 허무하게 무산된 카시야스는 후반 들어 눈에 띄게 흔들렸다. 후반 7분 데일리 블린트의 크로스가 아르옌 로번이 멋진 트래핑에 이어 페인트로 피케와 라모스를 제치고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진짜 고난은 세 번째 실점부터였다. 후반 19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측면에서 올라온 스네이더의 프리킥을 스테판 더 프레이가 머리로 받아 넣었다. 볼 경합 과정에서 판 페르시가 카시야스를 미는 장면이 나왔지만 심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거칠게 항의하던 카시야스는 오히려 경고만 받았다.
멘붕에 빠진 카시야스는 후반 27분 다시 판 페르시에게 두 번째 골을 헌납했는데, 자신이 수비 진영에서 이어받은 백패스를 어설프게 처리하다가 공을 빼앗기며 내준 자책골이나 다름없었다.
카시야스의 길었던 하루의 끝은 다시 로번이 장식했다. 역습 상황에서 스피드로 스페인 수비수들을 제친 로번은 개인기로 카시야스까지 농락하며 자신의 두 번째 골이자 이날의 마지막 득점을 장식했다.
현란한 드리블을 펼치는 로번을 상대로 그라운드를 기어 다니다시피 하며 필사적으로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지만 결국 또다시 골을 막지 못한 카시야스의 모습이 유난히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카메라가 카시야스의 얼굴을 비출 때마다 망연자실한 표정에는 곧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이날 대량 실점이 카시야스만의 잘못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스페인이 자랑하던 최전방에서의 강력한 압박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라모스-피케의 수비진은 네덜란드 공격수들의 빠른 스피드와 개인기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했다.
하지만 카시야스 역시 전성기의 모습과는 분명히 거리가 멀었다. 사실 카시야스는 지난 시즌 소속팀에서부터 눈에 띄게 흔들렸다. 잔 실수가 늘어났고 반응속도도 현저히 떨어졌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디에구 로페즈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델 보스케 감독은 카시야스가 대표팀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경험을 고려해 다시 한 번 카시야스를 주전 골키퍼로 낙점했지만 첫 경기부터 재앙과도 같은 경기력으로 고민거리만을 남겼다. 카시야스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 경기였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