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24>찬란했던 인류문명의 보고가 그대로 남았다면...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델포이는 그리스 종교의 중심지였다. 아폴론 신전은 미래에 대한 신의 계시만 전하는 곳이 아니라, 죄를 지은 인간들을 정화시킴으로써 삶의 부활을 이끌어 주는 성소이기도 했다. 속세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에 따른 속죄의 의무를 신탁의 형식으로 부과함으로써 인간 세상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델포이가 그리스인들의 물리적 도피처이자, 정신적 재생을 길로 이끌어주는 ‘씻김’과 ‘해원(解寃)의 성소 역할을 했던 셈이다.
아폴론은 ‘질서의 신’이었다. 아폴론은 그리스 문명 세계를 영적으로 결속시켜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됨으로써 아폴론 추종자들의 쉼 없는 참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델포이는 오로지 아폴론만을 위한 성역은 아니었다. 이성과 질서의 신인 아폴론만을 숭배하는 곳이었다면, 오히려 델포이의 신비감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델포이성역에서는 휴식과 자유, 일탈과 광란으로 이끄는 디오니소스 신도 함께 숭배되었다. 그리스 세계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공존하는 성역은 흔치 않았다.
아폴론 성역에서는 인간의 원초적 감성과 충동을 용인하는 디오니소스 주신제가 열렸다. 아폴론이 예언을 하는 3월부터 10월까지 아홉 달 동안 델포이 성역의 주신이 아폴론이었다면, 아폴론이 델포이를 떠나는 11월부터 2월까지의 동절기는 디오니소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델포이의 영적 여백을 채웠다. 아폴론이 주재하는 기간이 이성이 바짝 긴장되어 있는 기간이었다면, 디오니소스가 체류하는 기간은 감성이 해방되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절기에 디오니소스의 여성 숭배자들은 아폴론 신전 뒤편에 있는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 코리키안 동굴까지 무려 11km를 횃불과 북을 들고 춤을 추며 걸어갔다. 그들은 동굴 안에서 비밀 의식을 치렀다. 이들의 비밀의식은 참가자들 이외에 절대 비밀로 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벌인 의식과 행동이 어떤 것이었는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
디오니소스 의식에 참가한 여성들을 ‘실성한 여성들’ '광란하는 여자들‘이란 뜻의 마이나데스(mainades)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디오니소스 주신제가 술과 춤에 취해 희열의 비명을 지르는 여성들만의 한바탕 질펀한 축제의 마당이기도 했던 것 같다. 델포이 성역은 이렇듯 이성과 질서의 공간임과 동시에 자유로운 영혼의 해방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평소 남성 위주의 사회 문화 속에서 억눌려 지내야 했던 그리스 여성들이 남성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원초적 감성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었던 공식적인 일탈의 장이었던 것 같다.
서로 대조적 특질을 지닌 아폴론 숭배와 디오니소스 숭배가 공존한 델포이는 오히려 그리스 세계에서 더욱 그 명성과 권위가 높아졌다. 델포이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존경과 숭배는 남달랐다. 아테네의 솔론이 대대적인 입법 개혁을 하면서, 아테네의 집정관들이 관직을 수행하면서 법을 어길 경우 델포이에 황금 조각상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게 한 것도 델포이의 권위와 신성함에 기대어 공직자들을 다잡고자한 의도였을 것이다.
델포이의 권위가 높아질수록 델포이는 번영을 누렸다. 이에 따라 델포이의 신성한 권위와 보물을 탐하는 세력들도 늘어갔고 델포이의 안전도 위협받았다. 오랜 역사 동안 델포이를 약탈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아폴론 신전의 신성에 도전한 최초의 사건은 헤라클레스와 관련된다. 아폴로도로스가 그리스 신화를 종합 정리한 신화집 '도서관'(Bibliotheke)에는 헤라클레스가 델포이 성역에 와서 난동을 부린 이야기가 나온다. 헤라클레스가 살인죄를 저지르고 죄를 정화받기 위해 델포이를 찾았다가 생긴 일이다.
전말은 이렇다. 아우톨리코스가 에우보이아에서 약간의 소를 훔쳐 간 사건이 발생한다. 오이칼리아(Oichalia)왕 에우리토스는 이를 헤라클레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이피토스는 헤라클레스가 한 일로 여기지 않고 헤라클레스를 찾아가 함께 소를 찾아보자고 도움을 청한다. 헤라클레스는 흔쾌히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환대했으나, 광기가 도져 그를 티린스의 성벽에서 내던져 죽인다.
헤라클레스는 스파르타의 남쪽에 있는 아미클라이(Amyklai)에 가서 힙폴리토스의 아들 데이포보스에게서 죄를 정화 받는다. 하지만 이피토스를 살해한 탓에 몹쓸 병에 걸리자 헤라클레스는 델포이에 가서 어떻게 해야 병이 나을 수 있을지 신탁을 물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예언녀 피티아는 그에게 신탁을 내려주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헤라클레스는 예언녀의 삼각대를 탈취 해다가 자신의 신탁소를 만들려 한다. 이를 저지하는 아폴론과 헤라클레스가 싸우자 제우스가 그들 사이에 벼락을 던져 싸움을 중지시키고 헤라클레스에게 벌을 내린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가 3년 동안 노예로 봉사하고 에우리토스에게 살인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해야만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신탁을 내린 것이다. 그 후 헤라클레스는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에게 팔려가 종살이를 하게 된다. 헤라클레스가 여왕의 노예가 되어 여장을 하고 실을 잣는 등 여자의 역할을 하고, 밤에는 옴팔레의 시중을 들게 된다.
헤라클레스의 일생 중 가장 굴욕적이고 도착된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난폭한 성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저지른 살인죄와 델포이에서 난동을 부린 쓰라린 대가였던 셈이다. 헤라클레스의 아폴론 신전 난동 사건의 에피소드는 BC 6세기부터 5세기까지 아테네의 도기 화가들의 흥미로운 소재거리가 된다.
헤라클레스의 사건은 아폴론 신탁에 불만을 품고 신탁의 권위를 찬탈하려던 난동이었다. 하지만 신의 개입으로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아폴론 성역 전체의 약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아폴론 신탁의 상징물인 신성한 트라이포드(삼각대)를 탈취하려던 것은 심각한 사건이었지만, 그를 지원하는 배후 세력이 없었고 개인적 차원의 망동이었다는 점에서 신의 중재로 더 이상의 분란 없이 해결된 것이다.
델포이의 존망을 심각하게 위협한 것은 주변 국가들의 탐욕이었다. 델포이 지역은 동남쪽으로는 포키스, 북서쪽으로는 도리스, 북동쪽으로 동 로크리스, 서쪽으로는 서 로크리스 지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가운데 코린토스 만에서 델포이로 통하는 바닷길과 아테네와 테베 등에서 접근하는 육로의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포키스는 늘 델포이를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려고 했다.
번영하는 델포이를 차지하기 위한 인근 도시국가들의 야심은 불가피하게 전쟁을 야기했다. 모두 세 차례의 전쟁이 벌어진다. 델포이를 독점하려는 세력과 델포이를 그리스 세계의 공동의 자산으로 지키려는 세력 간의 전쟁이다. 이를 아폴론의 성역을 지키는 전쟁이라 하여 신성전쟁(神聖戰爭, The Sacred War)라 불렀다.
델포이를 침탈하려는 시도들이 노골화되자 이곳에 봉헌물을 바치는 12개의 인근국가들(amphiktyones)들은 델포이를 공동의 성역으로 지키기 위해 인보동맹(amphiktyonia, 隣保同盟)을 결성한다. 델포이의 공동 수호자를 자처한 것이다. 이들 12개 국가들은 봄에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을에는 테르모필라이(Thermopylai) 고갯길 근처 안텔레(Anthele)에 있는 데메테르 신전에서 함께 제물을 바치며 의지를 다졌다. 또 델포이 아폴론 신전을 공동 관리하기로 맹약하고 4년 마다 우의를 다지는 피티아 경기를 주관했다.
제1차 신성전쟁은 델포이 신전 지배자와 참배자들에게 과도한 과세를 주장한 로크리스인들에 의해 일어났다. 델포이로 통하는 산비탈에 있는 마을 크리사 사람들은 델포이 참배객에게서 통행세 형식의 세금을 징수하는 등 델포이 성역의 수입을 가로챘다.
이에 인보동맹 국가들은 크리사 사람들과 “몇 날 며칠을 싸워 그들의 땅과 도시를 황폐케 하라.”는 피티아의 신탁을 받고 크리사와 전쟁을 벌였다. BC 595년부터 BC 590년까지 지속된 전쟁은 인보동맹의 승리로 끝났다. 인보동맹의 군대는 텟살리아가 주력군을 형성했고 아테네와 시키온이 적극 협력했다.
제2차 신성전쟁은 포키스인들이 야기했다. 그들이 델포이를 점령하자 스파르타가 이들과 대적하여 델포이를 구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델포이는 포키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영역이 되었다. 아테네가 BC 448년에 델포이를 포키스령으로 인정하였다가 BC 421년에 스파르타와 맺은 니키아스 화약(和約)을 계기로 델포이의 독립을 재확인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 조치였다.
제3차 신성전쟁도 포키스인들에 의해 벌어졌다. BC 354년 포키스인들이 델포이를 점령하자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가 참전했다. 그는 포키스에게서 항복을 받고, 이들을 인보동맹에서 강제 탈퇴시키는 한편 포키스에게 주어졌던 2표의 투표권마저 몰수했다. 필립포스는 이 전쟁을 계기로 그리스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다. 아무튼 신성전쟁은 델포이를 독점하려던 주변국과 이를 인보동맹의 공동의 성역으로 관리하려던 나머지 인보동맹국과의 전쟁이었다. 델포이는 이 몇 차례의 신성전쟁을 통해 독립된 성역으로서 그리스 세계의 중심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델포이를 약탈하려는 외적의 침입도 여러 번 있었다. BC 490년의 페르시아 군의 침략 기도, BC 279년의 켈트족의 침공이 있었지만 아폴론 신의 가호로 이들이 침입할 때 파르나소스 산의 절벽에서 바위 덩어리가 쏟아져 내리는 이변이 일어나 이들을 물리쳤다.
실질적인 약탈은 로마인들에게 의해 자행되었다. 델포이를 약탈한 첫 번째 로마인의 불명예는 술라에게 돌아간다. 술라는 그리스 정복 전쟁 과정에서 끝까지 저항한 아테네를 빠른 시일 내에 굴복시키려 부심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드는 공성(攻城)기계를 제작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술라는 공성기계 제작을 위해 울창한 숲을 이루던 플라톤의 학교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교 리케이온 주변의 나무들까지 잘라냈다. 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도시국가인 에피다우로스와 올림피아에 보관된 보물을 징발했다.
이 때 델포이 성역의 보물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술라는 포키스 출신의 부하 카피스를 델포이로 보내 “그곳 신전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을 내게 보내주시오. 그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것이며, 혹시 사용하게 되더라도 꼭 갚을 것이오.”라며 보물을 내놓을 것을 압박했다. 델포이의 보호자 인보동맹(隣保同盟, Amphiktyonia)은 대신 보관하겠다는 명분 아래 실질적으로 보물을 약탈해 가는 술라의 교묘한 압박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반출해 간 보물 중에 어느 왕이 헌납한 거대한 은제 술통의 경우 너무 크고 무거워서 수레에 실을 수가 없어서 작게 잘라서 가져갈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의 군사력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쇠락한 그리스 세계가 당한 굴욕이었다. BC 2세기경에는 12개 국가의 인보동맹도 더 이상 델포이를 지켜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3차례의 신성전쟁을 벌이던 때와 같은 결집력을 보여줄 수 없었다. 로마군에 대적한만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델포이의 쇠락은 그리스 세계의 몰락과 이미 동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로마인의 약탈은 계속 되었다. 그리스 문명에 심취한 네로 황제가 500여개의 조각상과 보물들을 약탈해 갔다. 그는 그리스 문명을 진정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자기 옆에 두고 싶은 저급한 욕망이 약탈을 불러왔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명이 만들어낸 탁월한 예술작품과 보물들에 찬탄하고 이들 보물을 손에 넣고자 혈안이 되었다. 정작 그리스인들이 델포이에 바친 종교적 숭배와 영적 세계에 대한 열정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존중하지도 않았다.
로마인들에게는 델포이 신탁과 같이 무아경 속에서 예언하는 전통이 없었다. 피티아의 신탁 행위는 신비로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교도를 존중하던 초기의 황제들의 시기에만 델포이의 신비가 보호되고 번영이 유지될 수 있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na)’의 도래와 기독교의 확산은 델포이의 운명을 암울하게 만들었다.
로마 황제 가운데 델포이의 부흥을 성원한 사람은 81년에 황제가 된 도미티안과 최고의 문예부흥을 이끈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76~138) 황제였다. 특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5현제(賢帝)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리스 문명에 심취하여 아테네의 부흥과 그리스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델포이의 몰락을 가속화 시킨 것은 기독교 문명이었다. 기독교 주교들은 그리스 올림포스 신에 대한 숭배를 배척해야 할 이교 신앙으로 보았다. 그러니 그리스 신앙의 중심지였던 델포이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될 곳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아폴론은 사탄에 불과했다. 그들은 피티아의 신탁행위를 사탄의 마법에 걸린 여사제의 악마의 의식에서 나오는 사악한 예언으로 폄하했다. 아폴론의 신탁은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이교 신인 악마의 요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39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는 이교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이 조치는 델포이 성역을 기독교인들에게 의해 철저하게 파괴하게 방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물론 그 이후 361년에 그리스 문명에 심취한 율리아누스 황제가 배교자(背敎者)라는 낙인이 찍히면서까지 그리스 이교 신들을 복구하려 애썼다. 그는 델포이 신탁을 부활시키려 했다. 우선 델포이 인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사제들의 활동을 보호했다. 하지만 그의 2년간의 짧은 통치기간으로는 델포이와 그리스 신들의 부활을 이끌어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 문명을 사랑한 최후의 로마 황제였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델포이의 여사제에게 신탁을 구하는 사절을 보냈을 때, 아폴론의 신탁 대신, 그가 전해들은 최후의 피티아의 말은 아폴론이 주재하던 델포이의 몰락의 쓸쓸한 정황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왕에게 전하시오. 아름답게 공들여 지어진 집이 무너졌다고.
집에는 아폴론도 없고, 신성한 월계수 잎도 없다고.
샘들은 이제 잠잠하고, 목소리는 조용하다고.“
존엄하고 지혜로운 아폴론 신의 신비가 무너진 델포이 성역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니었다. 아폴론이 떠난 델포이는 그를 찬미하기 위해 봉헌된 숱한 보물들만 덩그러니 남아 폭력과 기독교 권력에 의한 약탈의 대상으로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델포이의 보호자로 자처한 로마였지만 실제로는 델포이 보물의 약탈자가 되어 있었다.
약탈된 숱한 보물들은 대부분 역사에서 그 자취가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는 몇몇 보물들도 권력자들의 손을 전전해야 했다. 그 대표적인 유물 두 가지만 소개한다. 세 마리의 뱀이 델포이의 상징인 트라이포드를 받든 청동 기둥과 이륜 전차를 모는 전차 마부상이다.
첫 번째 청동 기둥은 BC 479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군 등 31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대파한 것을 기념하여 BC 478년에 봉헌한 의미 있는 조상(造像)이었다. 특히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와의 3 차례의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거두어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전투였기 때문이다. 전제 왕정의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에 맞서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단결하여 거둔 ‘자유의 승리’는 아폴론 신의 가호로 주어진 영광으로 믿었던 것이다.
범 그리스 세계의 승전의 환희를 아폴론 신탁의 상징인 트라이포드를 받드는 형상으로 조상한 이유다. 이 청동 기둥의 밑바닥에는 플라타이아 전투에 참전했던 31개의 도시의 명칭이 새겨졌다. 공고하게 엉켜 위로 올라간 세 마리 뱀은 그리스 세계의 결집을 상징했다. 특히 이 청동 기둥은 페르시아 군에게서 노획한 청동 물자들을 녹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승전을 축하하는 기념물로 제격이었다.
더구나 이 청동 기둥의 맨 꼭대기에 트라이포드로 받친 황금 그릇이 있었다니 화려함까지 빛났을 듯싶다. 8미터 높이로 솟은 청동 기둥과 트라이포드, 빛나는 황금 그릇은 간결하면서도 위엄 있는 기념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을 것 같다.
델포이 성역을 빛내던 기념물인 이 청동 기둥은 그리스 세계의 자부심의 상징이었을 듯싶다. 하지만 이 보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로마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장식하기 위해 약탈해 간다. 그는 델포이에서 가져 간 이 청동 기둥을 로마의 경마장 히포드로모스(hippodromos) 광장에 설치한다.
2013년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 확인한 이 청동 기둥의 모습은 처참했다. 기둥의 상단을 장식하던 트라이포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약탈하기 전에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약탈 당시에도 아름답게 조상된 세 마리 뱀의 머리와 기둥들이 남아있었다. 1582년에 발간된 『축제의 책(Surname-i Vehbi)』에 묘사된 히포드로모스 광장에 설치된 델포이의 청동 기둥의 모습에서 세 마리의 뱀 머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세 마리 뱀 머리는 이 청동 기둥의 상징에 화가 난 한 술탄에 의해 잘려나가고 나머지 두 마리의 뱀 머리 역시 1700년 경 만취한 폴란드 대사와 일당들에 의해 잘려 나갔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델포이에서 2륜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The Charioteer) 조각과 함께 있던 네 마리의 대형 청동 말을 역시 콘스탄티노플로 반출해 갔다. 이 청동 마부상과 청동 말은 고대 그리스 청동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 가운데 하나다. 필자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작품 중 이렇게 정교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된 말 조각을 보지 못했다.
이 청동상의 원래 주인은 역시 델포이의 아폴론이다. BC 478년 젤라의 군주였던 폴리잘로스(Polyzalos)가 델포이 성역에서 열린 피티아 제전의 전차 경주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아폴로 신에게 봉헌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 작품의 조각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음에 틀림없다. 현재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는 마부상만 남아있다.
마부상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라. 청동 조각상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얼굴 표정이 정교하고 유려하게 조각되었다. 특히 눈, 구리 입술, 치아와 머리띠 등 주요 부분을 은 등으로 상감해 넣음으로써 생동감이 넘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약탈해 간 네 마리의 말은 현재 이스탄불에 없다. 어디로 갔을까? 2014년 5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산 마르코 성당의 박물관에서 역동적이며 아름다운 네 마리 말을 만날 수 있었다. 아폴론에게 봉헌된 델포이의 청동 말 조각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까지 와 있는 것 보면서 당대 최고의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탈취되고 유전(流轉)된 그리스 예술작품들의 운명을 고스란히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베네치아의 지배자 단돌로(Dandolo, 1107?~1205)가 1203년에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때 히포드로모스 광장에 세워져 있던 이 대형 청동 말 조각을 베네치아로 반출했던 것이다. 이 청동 조각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운구한 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 마르코 성당의 외부에 설치되어 성 마르코 광장의 명물로 관광객의 사랑을 받았었다. 2013에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보존을 위해 성당 내부 최상층에 박물관을 따로 만들어 성당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네 마리 청동 말 조각은 한 마리 한 마리마다 뛰어난 작품성을 보인다. 또 네 마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힘이 솟구치는 동세(動勢)의 아우라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가운데 두 마리는 각각 밖을 향해 머리를 뻗치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다. 반면 양끝의 두 마리는 반대로 머리를 각각 안쪽으로 향하며 안쪽 두 마리의 발산하는 힘을 안으로 다잡는 형국이다. 네 마리가 각각 원심력을 발산하고 구심력으로 수렴되는 듯 팽팽한 긴장과 균형감이 절묘하게 표현된 것 같다. 이 조각상이 델포이의 성역에 당당하게 서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뛴다.
델포이의 네 마리 청동 말 조각과 반대의 동세(動勢)를 보여주는 대리석 말 조각이 대조적으로 떠오른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신전의 외부를 장식했던 네 마리의 대리석 말 조각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BC 570년경에 만들어졌는데 안쪽의 두 마리가 서로 바라보고 있고, 양 옆의 두 마리의 머리는 각각 밖을 향하고 있다. 말의 동세의 구심력과 원심력이 델포이의 네 마리 청동 말 조각과는 반대의 형국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리석 말 조각이 정적(靜的)인 느낌을 준다면 델포이의 청동 말 조각은 동적(動的)인 느낌을 강하게 준다. 델포이의 말 조각이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델포이 성역을 가득 채웠던 아폴론을 찬미하던 예술 걸작들은 숱한 약탈자들에게 의해 약탈되고 유실되었다. 델포이의 영광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델포이를 달구던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열정, 그리스 문명의 배꼽으로 기능했던 델포이가 창출한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 삶의 태도는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정서로 면면히 전해 내려온 것 같다.
델포이가 더 이상 그리스 종교의 성지는 아니지만, 독특한 그리스 문명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델포이 신탁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 문명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게 될게다. (다음 회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넘어가 코린트 유적지를 돌아봅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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