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33>그리스의 나폴리, 포세이돈의 항구 나프플리온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아르고스 지방은 유난히 친족 간에 살인이 많이 빚어졌던 곳이다. 아트레우스의 가문의 비극이 서린 곳이다. 그 연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다나오스의 딸들이 저지른 집단 살인극에까지 닿게 된다. 이 비극은 갑작스럽게 아르고스에 나타난 이방인들의 탄원으로부터 시작된다.
탄원자의 보호자이신 제우스시여.
우리 일행을 굽어 살피소서. 우리는
가는 모래의, 레일로스 강(나일 강) 하구를 떠나
배를 타고 왔나이다.
……
경건한 인간들의 집을 지켜주시는 구원자 제우스시여,
이 탄원하는 여인들의 무리를 자비로운
입김으로 이 나라에 받아주소서. 그러나
남자들로 득실대는, 아이깁토스(이집트)의 오만한
아들들은 이 나라의 늪이 많은 해안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질주하는 배를 타고
넓은 바다로 표류하게 하소서. (1~33)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탄원하는 여인들'(Hiketides)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집트의 왕 아이깁토스가 50명의 자기 아들들과 다나오스의 50명의 딸들을 결혼시키려 하자, 다나오스는 딸 50명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여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아르골리스 지방으로 와서 구원을 요청한다. 아이깁토스와 다나오스는 쌍둥이 형제였다. 서로 왕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갈려 서로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렇다면 다나오스가 왕권 싸움에서 밀려 아르고스로 망명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상륙했던 곳은 바로 당시 아르골리스 지방의 관문 항구인 나프플리오(Nafplio)였을 것이다. 다나오스가 아르고스를 피난처로 삼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은 제우스의 사랑을 받던 이오가 이집트로 피신한 후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난 에파포스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 조상인 이오 할머니의 고향 아르고스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프플리오는 일찍이 번성했던 아르고스 왕국의 외항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늪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르고스 평원의 서쪽에 이나코스(Inachus) 강이 있어 강과 해안이 만나는 평원 지역이 늪을 형성하고 있었던 듯싶다. 나프플리오는 아르고스 평원이 에게 해와 만나는 동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높은 200여 미터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이곳을 방파제 삼아 인근에 항구가 형성되었을 듯싶다. 오늘날에도 팔라미디(Palamidi) 성채가 버티고 있는 이 산 아래를 둘러싸듯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아르고스 왕 펠라스고스가 보호를 탄원하는 다나오스의 딸들을 받아들이자, 50명의 딸들은 아르고스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펠라스고스의 중재에 의해 합동 결혼을 하게 된다. 문헌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합동결혼식인 셈이다. 하지만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 아버지 다나오스의 명령에 의해 히페름네스트라를 제외한 49명의 딸들은 마지못해 하게 된 결혼 첫날밤에 아버지가 준 단도로 자신들의 남편을 모두 죽이게 된다. 사촌 간에 대살인극이 빚어졌던 것이다. 아마 다나오스가 형 아이깁토스에게 밀려나 이집트에서 쫓겨나게 된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아내의 처녀성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살아남은 린케우스(Lynceus)는 훗날 자신의 아내 히페름네스트라(Hypermnestra)를 제외한 다나오스와 그의 딸 49명 모두 죽인다. 49명의 남편을 죽인 다나오스의 딸들은 죽은 후 밑 빠진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는 벌을 받게 된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아르골리스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변형된 이야기도 있다. 다나오스가 아르고스의 왕으로 지배하던 시기에 아이깁토스의 아들들이 집단 결혼을 요청하자, 이를 자신의 왕국을 빼앗으려는 계략으로 보고 딸들을 시켜 죽이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다. 이야기의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사촌 간의 집단 살인극이 빚어졌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형제간의 권력 다툼이 대를 이어 사촌 사이인 청춘남녀들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든 것이다.
나프폴리오에는 오디세우스와 관련한 흥미로운 전설도 있다. 원래 이곳은 포세이돈과 아미노네 사이에서 태어난 나우플리오스(Nauplios)가 개척한 곳이다. 그는 원래 에보이아 섬의 왕이었다. 그가 아르골리스로 진출하여 나프플리아(Nafplia)를 건설했던 것이다. 현재의 나프폴리온(Nafpolion)이다. 그는 항해술이 매우 뛰어나서 해상무역을 통해 도시를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바다에서 미케네, 아르고스, 티린스 왕국으로 입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으로 입항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람과 물산이 오가는 교류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또 그가 이아손이 주도한 콜키스의 황금양피를 구하러 가는 모험 행렬에도 끼었던 것을 보면 그 역시 당대의 각 지역 영웅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리스 전역에서 내노라 하는 영웅들은 거의 다 참가했었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함선 100척을 이끌고 트로이 정벌을 나선 항구도 이곳이었을 것이다. 이 엄청난 함선과 군사들은 아르골리스 지역의 미케네 왕국, 아르고스 왕국, 티린스 왕국과 나프플리아에서 징발되었을 것이다. 특히 원정군에는 나우플리오스의 아들인 팔라메데스(Palamedes)도 끼어있었다.
팔라메데스는 당대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11개의 그리스 알파벳을 추가로 만들었고, 저울과 화폐, 그리고 주사위를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꾀를 써서 참전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오디세우스가 참전하지 않자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총명한 팔라메데스를 보내 회유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스 전역의 영웅과 장병들이 트로이 정벌을 위해 들고 일어났을 때 오디세우스는 출전하지 않으려고 잔꾀를 부리고 있었다. 고의로 미친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팔라메데스는 오디세우스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씨앗이 아닌 소금을 뿌리는 광경을 보자, 오디세우스의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를 쟁기 앞에 갖다 놓는다.
그가 정말 미쳤는지 시험하려 한 것이다. 시험은 적중했다. 오디세우스는 아들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 쟁기질을 멈추고 아들을 안아 올렸다. 결국 오디세우스의 미친 짓이 고스란히 탄로 나고 말았다. 팔라메데스가 지혜롭기로 유명했던 오디세우스보다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정벌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디세우스는 사내답게 스스로 참전했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헬렌에게 청혼했던 그리스의 영웅호걸들은 헬렌에게 변고가 생기면 그를 구하러 가겠다는 약속을 사전에 했었던 것이다. 헬렌이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와 눈이 맞아 달아나자, 남편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와 그의 형 미케네 왕 아가멤논은 그리스 전역에 헬렌이 트로이에 납치되었다며 청혼할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시 청혼자들은 모두 참전하라고 사발통문을 보냈던 것이다.
사실 헬렌에게 청혼했던 각 도시의 영웅들은 설마 그런 변고가 생길 것이란 것을 미처 생각하지 않고 행한 약속이었지만, 어쨌든 신을 걸고 한 사나이들의 맹세였던 만큼 참전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던 것인 만큼 비겁한 행동을 했던 셈이다. 그런 터에 팔라메데스가 자신의 기만술을 폭로하고,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했었다는 점을 만천하에 밝혔으니 천하의 오디세우스의 자존심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는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깊이 자성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당한 치욕에 대해 마음 속 앙심을 품고 있다가 훗날 치졸한 방법으로 갚는다. 팔라메데스와 오디세우스의 이런 이야기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직접 언급되지 않았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자세히 나온다.
죽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두고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가 서로 차지하겠다고 그리스 군 장군들 앞에서 설전을 벌인다. 그때 아이아스는 오디세우스의 비겁한 점을 들추며 특히 그가 팔라메데스에게 저지른 죄악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아스는 오디세우스의 현란한 말솜씨를 당하진 못했다. 결국 동료 장군들의 투표에 져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오디세우스에게 내주고 말았다. 다혈질인 아이아스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사실 무공으로 따지자면 그가 오디세우스 보다 뛰어났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 설전에서 아이아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오디세우스가 황금과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보낸 것처럼 꾸민 가짜 편지를 팔라메데스 숙소에 미리 숨겨 두었다가 이것이 그리스 군에게 발각되게 한 후, 팔라메데스가 트로이 진영과 내통했다며 배신자로 몰아 돌에 맞아 죽게 했던 것이다.(Ⅷ 56~60) 오디세우스는 여러 가지 뛰어난 재능을 가진 팔라메데스를 시기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 최고의 지혜로운 자라는 평판을 팔라메데스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팔라메데스가 억울하게 죽자 아버지 나우플리우스는 그리스 군 진영에 아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보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사실 그리스 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팔라메데스를 보호했어야 옳다. 그가 오디세우스를 참전시키도록 팔라메데스에게 밀명을 내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리스 군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오디세우스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리스 군이 팔라메데스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자 나우플리우스는 이들에게 음험한 보복을 하게 된다. 총명했던 아들을 졸지에 잃은 아버지의 억울하고 피 끓는 심정을 이해할만 하다. 그는 그리스 군 장군들이 트로이 전쟁 기간 동안 첩을 두고 바람을 피운 사실을 그리스 본토에 있는 부인들에게 알리고 다니며 맞바람을 부추겼다.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도 그 대상이었다. 그의 계략은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겐 효과를 거두었지만 페넬로페에겐 먹히지 않았다. 훗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이기스토스와 불륜에 빠지고 아가멤논이 귀향하자 그를 도끼로 쳐 죽인 것도 나우플리우스의 간계가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트로이 전쟁의 무사 출발을 기원하는 희생물로 바친 것을 보복하고자 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것만으로는 나우플리우스의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고 귀환하는 그리스 진영의 함선들에 속임수를 써서 많은 그리스 병사들을 죽게 만든다. 귀항하는 항구에 불이 난 것으로 위장하여 배를 대려던 병사들이 바다로 뛰어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게 모두 오디세우스가 자신이 병역을 기피하려고 잔꾀를 부리던 것을 들통 나게 만든 팔라메데스를 모함해서 죽인 까닭에 빚어진 일이었다.
훗날 베네치아 사람들이 고대 도시 나프플리아 아크로폴리스에 성채를 크게 짓고 팔라메데스의 이름을 따서 '팔라미디(Palamidi) 성채'라 이름붙인 것도 조금이라도 그의 원혼을 달래고 침략자인 자신들에 대한 아르고스 지방 사람들의 증오심을 완화하려던 의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나프플리온에는 두 개의 성채가 있다. 구 시가지인 항구에 맞닿아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높이 100여 미터의 산등성이에 구축된 아크로나필리아(Akronafplia) 요새와, 북동쪽으로 이어진 216미터 높이의 나프플리아 아크로폴리스에 구축된 팔라미디 성채다. 구 시가지에서 왼쪽에 우뚝 솟은 곳이 팔라미디 성채이고, 오른쪽의 낮은 산등성이에 있는 것이 아크로나필리아 요새다.
아크로나필리아는 구 시가지 중심지와 바로 이어진다. 입장료는 없다. 걸어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아름다운 나프플리온 시가지와 항구, 그리고 바다에 떠있는 군함처럼 생긴 브르치(Bourtzi) 요새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크로나필리아 요새는 13세기에 베네치아 인들에게 의해 도시를 둘러싼 성채의 일부로 구축되었다. 성채의 벽에는 베네치아 공국의 문장(紋章)인 사자상이 남아있다. 이 사자상은 베네치아가 지배했던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해안 성채에도 설치되어 있다.
아크로나필리아 요새는 팔라미디 성채보다 규모는 작지만 항구를 제압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팔라미디 성채를 오를 시간이 부족한 관광객들이 둘러보기 적합한 곳이다. 이 산등성이를 오르지 않고 이 언덕 아래에 조성된 둘레 길을 따라 걸으며 에게 해의 풍광과 깎아지른 듯 절벽처럼 서 있는 이 언덕 아래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아크라나필리아 요새의 정상에 올라 동북쪽을 바라보면 팔라미디 성채의 험준한 산이 절벽을 이루어 바다와 맞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남서쪽의 구 시가지로 눈을 돌리면 바다 한 가운데 군함처럼 떠 있는 브르치(Bourtzi) 요새가 눈길을 끈다. 외적의 상륙을 저지하고 항구를 통제하기 아주 좋은 위치다. 항구에서 600여 미터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에 요새에 들어선 이유는 이렇다. 애초에 이곳에 암초가 있어 항구를 출입하는 함선이 좌초될 위험이 높았다고 한다. 항행의 위험을 줄이고 항구 출입을 통제할 목적으로 아예 이곳에 작은 섬을 만들고 요새로 만든 것이다.
당초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었지만, 요즘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겐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성채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19세기엔 그곳이 감옥으로 쓰이기도 하고 은퇴한 사형집행인들이 살았다는 으스스한 얘기도 있지만 이젠 나프플리온의 상징물이 될 만큼 정겹다. 부두에서 그곳까지 오가는 보트를 이용해 직접 둘러볼 수도 있겠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면 등대가 있는 항구의 왼쪽 방파제 끝까지 걸어가면 된다.
나프플리온은 미케네 시대에 번성한 항구도시였다가 BC 625년 아르고스 왕국에게 함락당한 후 쇠락했다. 그 이후 이곳의 지리적 중요성을 간파한 베네치아에 의해 11세기에 전략적 항구도시로 재건된다. 당시 그리스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점차 지중해의 패권을 베네치아에 뺏기면서 해안의 전략적 요충지를 하나하나 잃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중해 곳곳에 식민도시를 개척하던 당대 최고의 해양국가였던 베네치아 공국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진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이곳을 항구로 개발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13세기엔 지중해의 요충지인 크레타 섬까지 차지해 나프플리온과 해상로를 연결했다.
미케네 문명 시기에 아르고스 지방과 크레타 섬 간에 긴밀한 교류가 있었던 때처럼 나프플리온은 이때부터 중요한 무역항 역할을 하게 된다. 아마 이때부터 항구 보호와 도시 방어를 위해 아크로나필리아 요새가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나프플리온이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해지자,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투르크 제국과 베네치아가 이곳을 두고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1470년부터 시작된 투르크의 공세를 베네치아는 잘 막아냈지만, 결국 1540년에 투르크에게 빼앗기고 만다.
1686년 이곳을 탈환한 베네치아는 강력한 방어기지로 만들기 위해 1711년부터 1714년까지 거대한 팔라미디 성채를 쌓는다. 그곳은 200미터가 넘는 험준한 암산으로 물을 구할 수 없어서 방치되어 왔던 곳이었다. 아마 이곳을 설계한 프랑스 기술자 ‘라사이으(Lasalle)’가 물 조달의 문제를 해결했던 모양이다.
철옹성을 자랑하던 팔라미디 성채는 투르크의 공격으로 1715년에 함락당하고, 그리스 독립운동이 일어나 1822년 다시 그리스가 다시 찾을 때까지 나프플리온은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1821년에 그리스 독립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이미 1770년경부터 크고 작은 무장 봉기가 일어나는 등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마리 반도, 아르고스, 나프플리온 등이 그 거점 역할을 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자유를 갈망한 그리스인들이 무장투쟁을 하는 가운데 많은 피를 흘린 곳 중의 하나다. 또 팔라미디 성채는 독립전쟁 당시 투르크의 공격을 15개월 동안 막아낸 자유의 보류 역할을 했다. 특히 그리스의 독립 전쟁의 영웅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Theodore Kolokotronis, 1770~1843)의 주 활동 무대가 바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레아 기행’에서 “콜로코트로니스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였고, 풍요로운 현대 그리스인의 영혼 바로 그것이었다”고 말하며 그리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했다. 그의 부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트리폴리를 함락하고 투르크 군대를 몰아내면서 투르크 세력 축출의 전기를 만들었다. 그는 독립 전쟁에서 맹활약을 했지만, 주변의 내분에 의해 한때 이곳 팔라미디 성채에 있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의 무장 투쟁은 그리스 독립에 크게 기여했고, 당시보다도 오히려 현대에 와서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이런 독립 영웅들이 맹활약하던 근거지였던 나프플리온은 1822년 그리스가 독립 선언을 하고, 그리스 전역에서 투르크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후 1829년부터 1834년까지 독립 그리스의 첫 수도가 된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그리스인들이 호메로스의 영웅들이 누비던 그 터전을 다시 찾았을 때 얼마나 가슴 벅찼을 것인가.
자유를 잃어버렸을 때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의 왕이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게 흙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했을 때, 노예의 삶을 거부하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리스인들이 비잔틴 제국의 흥성했던 문화에 젖어 차츰 자유의 소중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베네치아와 프랑크, 그리고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지 않았던가. 19세기 그리스의 독립운동은 오랫동안 젖어있던 그리스인들의 나태와 태만,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가슴에서 퇴색되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다시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나프플리온은 그리스의 나폴리로 불린다. 그만큼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하지만 이 땅을 되찾기 위해 숱한 독립 영웅들이 흘린 피와 땀을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과거의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을 잊은 채 많은 내국인들과 외국 관광객이 찾아와 아르고스 만의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항구도시 노천카페의 낭만과 여유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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